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rrie Sep 11. 2021

퇴직금 잔혹사

나는 호구였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나는 일생에서 퇴직금을 딱 한 번 받아봤다. 만약 내가 계속 글로 먹고살 수 있다면 그게 내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퇴직금이었겠지.


그런데 그 기억이 너무 끔찍해 아직도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린다. 왠지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것 같아 그 경험담을 써보려고 한다.


나는 그다지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지 않다. 그중 가장 오래 일했었던 곳이 있었는데, 스물세 살 때부터 스물여덟 살 때까지 일했으니 거의 5년, 내 20대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냈었다. 말은 아르바이트였지만 사실상 그냥 직원이나 다름없었다. 평일 9시부터 5시까지, 꽤 규칙적이고 긴 시간을 근무를 했으니.


그러나 나는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아마 월급도 최저시급 이하로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무직으로 들어갔지만, 잡심부름을 할 때가 더 많았다. 심지어 ‘이런 일까지 내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사적인 일도 있었다. 게다가 출퇴근 시간은 왕복 2시간이 넘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다지 좋은 조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래 일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업무 자유도가 높았다. 업무가 없으면 자투리 시간에 내 일을 해도 되는 곳이었다. 물론 바쁜 날엔 근무 시간을 초과하는 날도 많았지만 어쨌든 내내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서비스직보다는 내 시간이 있는 편이었다.


둘째. 그때 난 지독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후에 그게 우울증의 전조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땐 몰랐다. 그저 거기가 아니면 일할 곳이 없을 줄 알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구질구질한 삶에 매너리즘을 느끼면서도 새로운 곳으로 떠날 용기는 없었다. 너무 익숙했고, 편했다.


셋째. 나의 상사들이 나를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했다. 물론 퇴직금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그들에게 진심이고 싶었고,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 4대 보험도 없이, 월급은 몇 년째 동결이면서도, 소속감을 가지기 위해 애썼다.


사실 그곳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사이는 좋았다. 비록 우울증에 짓눌려 죽을 것 같은 마음에 그만두긴 했지만, 나는 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제일 의지하던 분의 퇴직 관련 업무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기나긴 아르바이트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던 찰나였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일을 시작하고, 비슷한 시기에 일을 그만둔 동생이 말했다.


“언니는 왜 퇴직금 안 받아요?”


머리가 띵 울렸다. 나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거였던 건가. 나는 너무나 근로법에 무지했고, 한 곳에서만 일을 했기에 그런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쪽도 그랬던 것 같았고.


“난 받았어요. 언니도 얼른 말해서 받아요.”


급하게 인터넷을 켰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근로법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퇴직금 계산기도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작은 월급이었기에 5년의 대가 치고는 터무니없었지만 그래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 날, 나는 조심스럽게 책임자분에게 연락을 드렸다.


[퇴직금을 받고 싶습니다.]


잠시 후 답변 문자가 왔다. 알아보고 연락해주겠다고. 금방 연락이 올 줄 알았다. 알아보고 말 것도 없으니까. 난 이미 고용노동부와 상담까지 마친 상태였으니까. 내겐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지극히 정당한 권리가 있었다.


그래. 내 5년. 대단한 일을 하시는 그분들에게 내 노동력은 하찮게 보였겠지만 어쨌든 난 노동을 했고, 이런 노동자를 위한 법이 대한민국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후로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연락이 없었다. 나는 돈 자체보다도 이 상황이 너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어떤 걸 알아봐야 한 달이나 걸린다는 걸까. 500만 원도 채 안 되는 금액을 지급하기 위해서.


다시 연락을 드렸다. 업무 지시를 할 땐 그렇게 내게 수시로 연락하더니, 퇴직금 이야기가 나오니 그들은 절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늘 내가 먼저 해야만 했다.


슬슬 화가 났다. 난 그들에게 돈을 구걸한 게 아니다. 난 받아야 할 돈을 요구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고, 온종일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불편한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났다. 난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나를 힐난하기 시작했다.


[OO 씨는 참을 줄을 모르나요? 이렇게 계속 연락하면 어떡하죠?]


어이가 없었다. 참을 줄을 모르냐고? 누가 퇴직금에 참을성을 논해요. 게다가 그 당시 나는 너무 지쳤던 나머지 당장 돈을 주지 못하더라도 일단 확정이라도 해달라고 했다.


줄 건지, 안 줄 건지. 준다면 언제쯤 입금할 건지. 아마 제대로 된 일정만 안내받았어도 내 마음은 한결 편했을 거고, 이토록 서럽지도 않았을 거다. 그들은 그것조차 해주지 않았다.


종국엔 이런 말도 이어졌다.


[변호사한테 자문 구해둔 상태예요. 퇴직금을 줘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이젠 정말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화는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퇴직금을 위해서 변호사 자문까지 구한다고? 그 (퇴직금 치고) 소액을 주기 싫어서? 왜 이렇게 사람을 구차하게 만들어요?


정말 치졸했다. 그들은 분명 어른이었고,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엘리트 집단이었다. 아마 내가 직접적으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놀랄 사람도 몇 있을 것이다.


가장 충격적인 건 그들은 나더러 항상 ‘가족’이라고 했었다. 내가 소속감을 가지려고 애쓴 것도 그들이 그렇게 해달라고 직접 부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난 존중받는 줄 알았고, 한 일원으로 인정받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멍청했고, 순수했다.


뚝. 이성이 끊겼다.


나는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 사실 그냥 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미리 통보한 것이다.


돌아온 답은 비슷한 맥락이었다. 내가 어려서 잘 모르는 거라고 했다. 그래 봤자 나만 괴로운 큰 싸움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내게 불리할 거라고. 피로만 쌓일 거라고.


맞다. 내가 그 회사 자체를 신고한다면 분명 일은 커질 것이고, 시끌벅적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의 근로 기간을 인정하는 문자를 주고받았다는 것과, 나의 근로를 인정해줄 수많은 증인이 있다는 것을. 나와 비슷한 자리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직접 증인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웃기지.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고용노동부 이야기를 꺼낸 그날 밤에 바로 퇴직금이 입금되었다. 나한테는 그토록 간절하던 돈이 그들에겐 그냥 휙 줘버려도 상관없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내리누르려고 변호사까지 찾아갔단다.


과장이란 분에게서는 이런 문자도 왔다.


[뒤통수 맞은 느낌이네.]


뒤통수를 맞은  저라고요.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아서 서운했다고 하시는데, 그런  원래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주셔야 하는  아닌가요?  5 내내 4 보험이나 근로계약서 같은   번도 제안하지 않으셨죠? 본인이 퇴직금을  달간  받아도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느긋하게 기다리실 건가요? 아니잖아요. 고소하셨을 거잖아요.


그렇게 몇 개월간의 개고생이 허탈하게도 퇴직금은 즉시 지급되었다. 사실 입금된 금액도 매우 찝찝하긴 했지만 그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그 몇 달 내내 내 우울증은 더욱 극심해졌고 스트레스성 위염, 두통 등을 달고 살았다. 화병으로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퇴직금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해방된 느낌이었고, 당연한 권리도 어쩔 땐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나는 그 돈을 쓰기 싫었다. 보면 울화통이 터져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결국 그 돈을 부모님께 생활비 명목으로 드렸다.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글을 쓰다 보니 다시 위염이 도지는 모양이다. 속이 쓰린 걸 보니. 진이 다 빠지네.


누구나 다 일을 하며 살지만, 그중 소수는 권리를 보장받기 힘든 사각지대에 있을 수도 있다. 그 사각지대를 이용해 먹으려는 나쁜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이 힘든 과정을 전부 거치고 난 사람으로서 하는 말인데, 무조건 항의해야 한다. 나의 근로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놓고(이왕이면 문자나 메일 같은 텍스트로),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은 후 세게 이야기해야 한다.


나처럼 물러 터지게, 오래 일한 정을 생각해서 마냥 기다리기만 하다 보면 언제까지고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마음의 병은 덤이고.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하라. 그러면 바로 담당 직원이 파견되어 회사를 조사한다고 하니. 그게 무서워서라도 퇴직금은 금방 주게 되어 있다. 특히 규모가 있는 집단이라면 더더욱.


불편해질까 봐, 껄끄러울까 봐 망설일 필요 없다. 그동안 쌓아온 관계가 와르르 무너지더라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애초에 좋은 관계였다면 이런 지저분한 싸움으로까지 번지진 않았겠지.


이 계기로 배운 사람들이라고 인품까지 다 훌륭하진 않다는 걸 깨달았다.


또 일하는 사이에 ‘가족’ 같은 건 없다. 퇴직하고 돈 문제로 얽히면 그렇게 매정한 남남일 수 없다.


마지막으로 무지한 내게 정당한 권리는 알려준 그 똑 부러진 동생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전 11화 왜요? 제가 완벽주의자인 척하는 게으름뱅이로 보이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