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

낯선 갈림길에서 찾아낸 마음의 약

by 이정윤

구들 지음 | 네이버 웹툰


트라우마를 가진 주인공이 떠나는 심리 여행. 이 웹툰은 스릴러가 가미된 미스터리 심리극입니다. 제3의 관찰자 혹은 의사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다른 심리극과 달리 환자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심리학적 고증을 더해 극 초반부터 인물 관계나 복선 하나하나를 치밀하게 깔아두었기 때문에, 처음 읽을 때는 이야기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친절하게도 24화와 25화 사이에 스토리 중간정리편이 나오니 꼭 보길 권합니다.스토리 초반을 어느 정도 견뎌내고 본다면 이후 몰입도가 몇 배가 높아지는 저력을 지니고 있죠. 심리학 지식에 얽매이지 말고 정주행한 뒤 다시 초반으로 돌아와본다면, ‘이 내용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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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미, 나만 볼 수 있어요

TV에 펼쳐진 이국의 화산지대. 주인공 한기로는 아는 사람도 모순도 없는 그곳에서는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그곳에 꼭 가자고 사랑하는 아내와 약속합니다.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 그러나 그들에게도 그늘은 있습니다.기로는 실직 후 하루도 빠짐없이 정체불명의 악몽에 시달립니다. 매일 꿈속에서 기괴하고 끔찍한 형상을 반복적으로 만납니다. 그의 고통을 보다 못한 아내가 조심스레 정신과 치료를 권합니다.

한 블로그의 글을 보고 찾아낸 작은 병원.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인상의 의사가 그를 맞아줍니다. 하지만 기로에게 그의 최면요법은 효과가 있었고, 의사 역시 효력에 감탄하며 연달아 2회 진료를 해줍니다. 그날 밤, 기로는 모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꿈 속 이야기가 바뀐 걸 제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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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상쾌한 아침을 맞은 기로에게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거미와 닮은 괴생명체가 귀에서 기어나오는 겁니다. 게다가 기로에게 말까지 겁니다! 그 거미는 기로만 볼 수 있습니다. 환각인 거죠. ‘도대체 의사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기로는 혼란에 빠집니다.

날벼락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병원을 찾은 기로를 맞아준 건 그 의사가 아니라 경찰. 병원은 무허가였고, 최면 요법을 해준 의사는 불법 의료행위 수배범 기현도, 일명 ‘닥터 D’. 그의 전담 수사를 맡은 최 경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전에도환자들에게 망상을 주입시킨 적이 있었으며, 그에게 4~5회 치료를 받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지경에 빠진다는 겁니다. 개중에는 두세 번만에 미친 경우도 있다고.그날 뉴스에서는 닥터 D의 도주 소식과 함께 그의 과거 행적을 전해줍니다. 닥터D 역시 정신병력이 있다니, ‘정신병자가 정신병자에게 치료’를 받은 셈입니다. 기로는 깊은 자괴감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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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무의식 세상, ‘푸른 방’을 찾아라

닥터 D도 사라지고 딱히 뾰족한 수도 없는 상황. 결국 기로는 거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닥터 D 피해자들의 치료를 전담하는 정인수 박사는, 거미의 존재를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네요. 망상이라고 인식하고 부정하려고 하면 더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고.

거미는 기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예전 기로에게 악몽을 선사했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찾아가 그들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라고. 기로를 늘 부당하게 괴롭히고 결국 해고로 내몰았던 예전 직장의 상사, 현란한 말솜씨로 주식을 사게 꼬드겨 거액의 빚을 안긴 동료, 학창시절 폭력을 휘둘렀던 옛 동창…. 기로는 그들이 잠들었을 때 거미의 안내를 통해 그들의 꿈을 보게 됩니다. 그들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악몽에 시달리는 걸 안 기로는 그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최면을 통해 그들의 꿈속으로 들어갑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그들의 과거를 암시하는 기괴한 형상의 등장. 기로는 거미의안내로 그들의 무의식 가장 안쪽, 푸른 방을 찾아내는 여행을 합니다. 물론 도중에 자신이 본 것들의 의미를 기로가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타인의 무의식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후, 기로는 한결 편해졌습니다. 상대를 용서할 마음은 없지만 증오도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꿈에 그들이 나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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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만이 치유는 아니야

무의식 여행 후 마음의 평화를 얻은 건 기로만이 아닙니다. 기로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들 역시 조금 인간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들은 동물의 왕국 같은 현대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약한 내면을 감출 가면을 써왔지만 기로와 무의식을 교류한 후, 무거운 가면을 조금 내려놓게 된 겁니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거미가 기로에게만 보이는 건 분명 조현병 증세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기로는 무의식 여행을 통해 트라우마에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정인수 박사는 기로의 증상을 관찰하면서 점차 닥터 D의 그림자를 의식하게 되는데….아직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사람의 정신세계처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투박하지만 깊은 매력을 가진 작품입니다. 장편 소설처럼 촘촘한 이야기 구성도 그렇고, 심리학에 스릴러 요소까지.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미스터리한 치유력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지닌 분들에게 이 작품을 권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지닌 주인공의 입장에서 묘사되는 감정선 중에는 우리도 한 번쯤 느꼈을 법한 것들이 많거든요.특히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면 더욱.

기로는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갔을 땐 감정 이입해 그들의 아픔을 직접 몸으로 느낍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온전히 자기 것처럼 느끼는 감정 이입의 힘이,훗날 기로가 스스로의 아픔을 치유할 잠재력으로 이어질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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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감정 이입이 약이 된 건, 기로가 그들과 ‘대등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그들과의 관계에서 트라우마를 갖게 된 이유는 상하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직장 상사거나 금전문제가 얽혀 있는 등 기로의 ‘생존’과 직결돼 있었거든요. 이 상하관계는 기로가 학교를 졸업하거나 회사를 그만두면서 끝납니다.

지배관계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지배당하는 쪽이 지배하는 쪽에 공감하는 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질이 범인에게 공감하는 심리현상인 ‘스톡홀름 증후군’을 볼까요? 인질극처럼 극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굳이 공감할 필요없는 상대에게 공감하는 것도 포함되지요. 평소 자신과 사이가 안 좋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상대에게 얽매이거나,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도 스톡홀름 증후군의 일종입니다. ‘저 사람은 원래 선량한 사람인데, 그 사람 딴에는 잘해주려고 하는 거야.’ ‘저 사람이 날 괴롭히는 건 뭔가 괴로운 사정이 있어서일 거야.’


상대의 사정이 어떻든, 누구도 우리 자신을 괴롭힐 권리는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는 냉철함이 오히려 치유력을 갖기도 하니까요.


이 글은 <유레카> 39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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