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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Mar 24. 2024

인제 기룡산을 오르며

인제 기룡산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할 때 디카시와 걷기 주제로 글을 올리겠다고 해 놓고는 디카시만 잔뜩 올려놓고 걷기에 관해서는 해파랑길 5일 걸은 글만 달랑 올리고 내리 쉬고 있었다. 개학하고 바쁘기도 했고 2월부터 신체 일부가 고장이 나서 일하는 시간 빼고는 거의 누워만 지냈다.


블로그에 꾸준히 일상을 올리는 A, B(이 분들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할 예정)를 보며 자극을 받기도 하면서 미안하기도 했다. 올해부터 브런치든 블로그든 어디든 글을 써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면 좋겠다고, 함께 해보자고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그렇지만 진심을 담은 글이 감동을 준다, 그냥 자기 이야기 쓰면 된다, 이렇게 어쭙잖게 격려를 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이번주부터 몸이 좀 괜찮아진 것 같아서 미뤄뒀던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니 그동안 등산과 걷기를 하면서 사진만 잔뜩 찍어뒀을 뿐 메모를 남겨놓지 않아서 그날의 느낌과 생각이 흐릿해져서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걸었던 길들을 다시 걷는 수밖에.


소양강 자전거길을 걸을까, 원통까지 걸어갈까 생각하다 기룡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나가려고 준비하는데 B한테서 전화가 왔다. 따질 게 있어서 전화했다고 했다. 근데 선생님은 왜 요즘 글 안 쓰세요, 왜 우리 글만 읽고 선생님은 글을 안 쓰시는 거예요, 했다. 그렇잖아도 오늘 B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고 나도 이제는 써야겠다 싶어서 기룡산에 갔다 와서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내가 이달 초에 글 2개를 올리고 쉬는 사이 이달에만 오늘까지 A는 16개, B는 7개의 글을 올렸다. 두 사람한테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건강해야만 하고 분발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낀 행복이 빚으로 쌓여있다.)


2주째 감기로 골골대는 남편이 혼자서 산에 가는 거 아니라며 가지 말라고(건성으로, 내가 말 안들을 걸 아니까) 했지만 1시 30분에 집을 나왔다. 전망대까지만 다녀올 생각으로 차 트렁크에서 등산화와 등산스틱만 꺼냈다.


인제에 사는 4년 동안 기룡산은 여러 번 다녀왔다. 동네 뒷산 오르는 기분으로 다닌 곳이라 기룡산 정상까지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보통은 40분 정도 소요되는 전망대까지, 조금 더 체력이 있으면 활공장까지 다녀왔다. 딱 한번 남편과 활공장 지나 샘터까지 갔다 온 적이 있다.


기룡산은 인제읍내 바로 뒤에 있는 산으로 소양강 건너 비봉산과 마주 보고 있다.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아서 복룡산 또는 와룡산으로 불리다가 용이 누워 있는 것보다 일어난 것이 낫다 하여 기룡산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기룡산 입구까지는 2분도 걸리지 않는다.


인제읍에서 기룡산으로 오르는 길은 다섯 군데다. 인제고와 인제중 사이 돌계단으로 가는 길, 하늘내린 유치원과 강화사 사이로 가는 길, 인제교육청 쪽으로 가는 길, 인제군청 옆 충혼탑으로 가는 길, 충혼탑 옆 임도를 따라가는 길 이렇게. 그중에서 오늘은 하늘내린 유치원과 강화사 사이 길로 올랐다.


중간중간 표지판 나올 때마다 사진도 찍고, 생강나무 꽃 올라오는 것도 보고, 새소리도 듣고, 정자에 앉아 쉬기도 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고 날도 포근하고 시간도 많아서 급하게 오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전망대에 도착해서는 목이 말라서 그만 내려갈까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산에 오니 기분이 좋아서 좀 더 걷고 싶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활공장(패러글라이딩 장소, 요즘은 안 함)을 지나 샘터까지 가게 됐다. 샘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정표를 보다 15분만 더 가면 또 다른 기룡산 입구, 즉 기룡산 끝지점에 도착한다는 판단을 해버렸다.


산악코스 입구를 등산로 입구로 잘못 읽은 줄도 모르고 오늘 드디어 기룡산을 끝까지 걸어보는구나 싶었다. 등산로 입구라 적힌 곳에 도착하면 남편에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할 마음도 있었다. 드디어 이곳이 끝인가 하며 안내 표지판을 보다가 그곳은 등산로 입구가 아니라 임도에서 기룡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악코스 입구라는 걸 알았다.


그건 그렇고 정상까지는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되나 싶어서 안내 지도를 보는데 기룡산 등산로 끝지점에 적힌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가아리'. A가 사는 동네다. '가아리'라는 단어를 본 순간 다음번에는 가아리까지 가든지 가아리에서 출발하든지, 어떻게 하든 기룡산을 완주하고 말겠다는 의욕이 솟구쳤다. A와 B와 나는 인제에서 양구 넘어가기 전 동네인 가아리에서 인제읍내 갯골 입구까지 산길을 5시간 가까이 함께 걸은 적이 있다.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섰다. 돌아올 때는 조금 빠르게 걸었다. 전망대 갈림길에서는 올라왔던 산림헌장비 쪽이 아닌 인제고 쪽으로 내려왔다. 따가운 햇빛을 피해서 그늘로 가고도 싶었고 목이 말라서 길이 좀 가파르더라도 빨리 내려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니 4시 30분. 인제고 쪽으로 내려와서 강화사 입구에 왔을 때가 4시 20분이었으니 천천히 걸어서 2시간 50분 정도 걸린 등산이었다.


혼자 산행을 하며 걷지 못하고 누워만 지내는 동안 잠깐 스친 독서와 등산의 닮은 점을 생각해 봤다. 처음은 힘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저절로 읽히는 책처럼 등산도 그렇다. 독서가 또 다른 독서로 이어지듯 등산을 하다 보면 또 다른 등산으로 이어지는 것도 닮았다. 독서로 생긴 근육과 등산으로 생긴 근육이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게 한다는 점도 닮았다.


성격이 급한 편이라 책을 읽을 때도 내용이 궁금하여 빠르게 읽는 편이다. 밑줄을 치거나 책을 접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데다 기록까지 하지 않으니 어떤 때는 읽고 나서도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를 때도 있다. 책을 읽고 글까지 써야 된다면 부담스러워서 책 읽기가 싫어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등산으로 건강해지면 되지 굳이 기록까지 해야 하나 생각했었다.


나의 독서가 주변도 보지 않고 빠르게 올라가서 정상에서 인증샷을 찍고 내려오는 등산과 뭐가 다른가 생각했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썼을 어떤 멋진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 따위는 갖지 않았다. 그동안 기록하지 않은 나의 등산과 기록하지 않은 독서가 아까웠다. 책도 이제는 좀 천천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등산처럼 읽었던 책들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등산도 독서도 기록해 가면서 즐겁고 건강하게.





(좌) 하늘내린 유치원 옆길(13:36)  (우) 산림헌장비 쪽으로(13:39)


산림헌장비앞 기룡산 안내도(13:54)


(좌)  활공장 가는 길                (우) 전망대(14:28)


(좌) 활공장(14:39) (우) 활공장 지나 샘터 가는 길 화장실


(좌)샘터 가기전 이정표   (우) 샘터(14:53)
기룡산 소개 글(샘터 옆)
산악코스 입구(15:09) 오늘은 여기까지만


(좌) 춘분날 내린 눈 (우) 원통 뒤로 눈덮힌 설악산이 멀리 보인다


(좌) 전망대에서 인제고 쪽으로 하산(15:41) (우)  생강나무꽃


(좌)  진달래    (우) 인제고와 인제중 사이 기룡산 입구(16:10)





이미 여러 선조들이 등산이 독서와 같다는 말을 했으며 퇴계 이황이 남긴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라는 한시도 있다는 걸 검색으로 알게 되었다. 이 한시를 읽으면서 그렇게 늙고 쇠잔하지도 않으면서 등산도 독서도 날림으로 한 내가 깊이 부끄러워졌다.



讀書如遊山 독서여유산 (퇴계 이황)


讀書人說遊山似 독서인설유산사

今見遊山似讀書 금견유산사독서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진시원자하

淺深得處摠由渠 천심득처총유거

坐看雲起因知妙 좌간운기인지묘

行到源頭始覺初 행도원두시각초

絶頂高尋勉公等 절정고심면공등

老衰中輟愧深余 노쇠중철괴심여


사람들은 독서가 유산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유산이야말로 독서와 비슷하네

공력이 다 하면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얕고 깊음을 아는 것 모두 이로부터 말미암네

앉아서 구름 이는 것 보면 묘리를 알게 되고

걸어서 근원에 닿아야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정상에 오르려 노력하는 그대들이여

늙고 쇠잔하여 중도에 그친 내가 깊이 부끄럽네





걸은날 : 2024년 3월 23일

운동시간 : 3시간

운동거리 : 7.19km

평균속도 : 2.5 km/h

소모열량 : 384kcal

걸음수 : 14,114보

날씨 : 5~16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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