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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Jun 04. 2024

치를 떨고 악을 쓰며, 왜 그렇게 걷는 거야?

치악산 종주기

둘 다 한번 뱉은 말은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라 무모하게 브레이크 없이 돌진할 때가 많다. 이번 치악산 종주는 무모함의 절정판인 듯하다.


인터넷을 대충 찾아보고 성남탐방지원센터에서부터 구룡탐방지원센터까지 치악산 종주에 빠른 사람은 8~9시간, 보통은 10시간 정도면 되는가 보다 생각했다. 우리는 구룡사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해서 상원골 주차장에서 마칠 테니까 1시간 이상은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 천천히 걸어도 10시간 정도면 될 거라 생각했다.




"미쳤어? 거길 왜 가, 가지 마, 미쳤어, 미쳤어"


치악산에 갈 거냐고 남편에게 물었을 때 돌아온 말이다. 치악산 가장자리를 크게 도는 임도 위주의 둘레길은 어찌어찌 따라다닌 남편. 치악산 둘레길 11코스를 마친지 일주일 만에 치악산을 종주하겠다며 9시간 정도 걸리는데 갈 거냐는 나의 말에 교양인을 자처하는 남편 입에서 미쳤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치악산 종주에 9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걸 그때 말했다면 남편 입에서는 어떤 표현이 나왔을까? '미쳤어' 정도는 아닐 게 분명하다.


치악산 정상에서 뭔가 엄청난 걸 먹어야 한다고 B가 말했다. 엄청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둘 다 냉면을 떠올렸다. 컵냉면을 먹기로 했다. 주중에 인제의 세븐일레븐에서 컵냉면을 사서 연습 삼아 먹어보니 맛이 썩 괜찮았다.


치악산 종주를 위해 B는 전날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잤다. 4시 20분. 알람 소리에 일어나서 4시 50분경에 집을 나왔다. 구룡사에 차를 세우고 5시 30분쯤 걷기 시작할 때는 치악산을 넘어가서 반대편 신림 쪽에서 2시쯤에는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구룡사에서 세렴폭포까지는 가뿐하고 좋았다. 세렴폭포 다리를 건너서부터 시작되는 사다리병창은 워낙에 각오를 하고 왔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나는 사다리병창을 20대에 한번, 30대에 한번 올라간 적이 있고 B는 처음이었다). 가파른 계단에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지만 날이 흐리고 시원해서 걷기에 좋았다. 출발한 지 3시간 10분 만에 비로봉 정상에 올랐다. 쉬엄쉬엄 걸었는데도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바람이 불고 가는 비도 몇 방울 떨어졌다. 냉면 먹기에 추운 날씨였다. B는 얼음까지 넣은 냉면을 먹고 나는 온면으로 만들어 먹었다. 냉면을 먹으며 뭐 사다리병창, 이 정도면 별거 아니네, 이제 능선 따라 슬슬 걸어서 내려가면 되겠네, 그런 오만방자한 생각을 했다. 40분 정도 쉰 뒤 다시 걷기 시작할 때 비로봉에서 상원사까지 10.2km라는 표지판을 보고도 둘레길만 생각하고 3~4시간이면 충분하겠다 생각한 것이다.


비로봉에서부터는 내리막이거나 편안한 능선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막연히. 비로봉에서 상원사 가는 길은 거리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비로봉에서 곧은재 가던 길에 허리에 갑자기 '찌릿~'하는 통증이 지나가서 나도 모르게 "아~악"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앞에 가던 B를 불렀다. 그 전주에 1박 2일 수학여행, 그 주에 4일간의 학생 야외 체험 인솔로 허리가 고장이 난 상태였는데 걷는 데는 지장이 없던 허리였다. 놀란 B. 배낭을 달라고 하더니 내 배낭을 앞으로 멨다. 몇 걸음 가는가 싶더니 안 되겠다며 배낭을 다시 풀었다. 앞으로 배낭을 메니 발 내딛는 곳이 안 보여서 위험하다고 했다. 내 배낭의 짐을 모두 빼서 B가방에 넣고 나는 빈가방을 메고 걸었다. 가방의 모두 짐을 넘기자 그 후로는 거짓말처럼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의 몇 백 미터가 얼마나 먼 길인지 알았다. 치악산의 '악'은 사다리병창 쪽에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하산길에 자칫하면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실족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하고 걸었다. 무릎, 발목, 발바닥. 어디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만약 치악산에 산불이 난다면 최초의 발화지점은 나의 발바닥 아래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파도 걸어야 했다. 걸어야지만 길이 줄어드니까. 걷지 않고는 치악산을 빠져나가지 못하니까.


발걸음을 옮기는 B의 등산화가 떨리는 게 보였다. 젊다고 덜 힘드나, 몸이 가볍다고 덜 힘드나. 힘든 건 마찬가지일 텐데. 이러다 사람 잡겠네. 나는, B와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가, 지리산 종주를 위한 예행연습을 왜 이렇게 무리하면서 하나, 이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자중해야지, 다시는 이런 독이 되는 산행은 안 해야지, 다짐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데 거리는 좀처럼 줄지 않는 꿈속 같은 몽롱한 느낌이 들었다. 가도 가도 상원사는 나오지 않고, 상원사가 나오려면 남대봉이 먼저 나와야 하는데 남대봉은 도대체 언제 나타나는 거야. 그러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생뚱맞은 남대봉 표지석을 만났을 때, 남대봉 아래 그림 같은 상원사를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이제 살았다 싶었다.


남편에게는 1시 30분쯤 상원골 주차장에 데리러 오라고 카톡을 보내놓고 새벽에 나왔었다. 그 시간에 못 맞출 것 같아서 12시쯤 넘어서 2시 30분에 오라고 다시 문자를 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또다시 3시 30분쯤에 오라고 문자를 했다. 4시쯤에 상원사에서 통화를 했다. 한 30분에서 1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남편이 기다리는 상원골 주차장에는 5시 40분에 도착했다.


이름대로 치를 떨고 악을 쓰며 걸었다. 치악산에 하루 종일 갇혀있다가 풀려난 기분이었다. 비로봉에서 냉면 먹을 생각에 덜 뜬 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12시간 후에 세상의 모든 산 앞에서 특히 치악산 앞에서 겸손해야겠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산행을 마친 후.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자, 치악산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말자' 하고 헤어진 B. 다음 날 저녁에 카톡이 왔다. 상원사 해돋이 보고 싶지 않냐고. 보고 싶지 당연히, 이번에 못 본 영원산성과 영원사도 보고 싶지. 치악산에서의 그 고통을 하루 만에 잊고 또 상원골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상원사-영원산성-영원사-금대리로 내려오는 다음 산행을 계획하며 행복해하는 B와 나. 둘 다 미친 게 확실하다.




[구룡사~상원사 소요시간 12시간 10분]


구룡사 주차장(5:31)

세렴폭포(6:17)

말 등 바위 전망대(7:29)

비로봉(8:43), 휴식 40분(9:23)

비로봉 황장금표(9:40)

쥐너미재(9:55)

황골삼거리(10:06)

곧은재(11:59)

향로봉(12:51)

종주능선 전망대(14:40)

남대봉(15:08)

상원사(15:40), 휴식 24분(16:04)

상원골 주차장(17:41)


[주차장 주소]


상원골 주차장 :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 산 170-2


구룡사 주차장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걸은 날 : 2024.05.25.(토)

걸음 수 : 41,446

구룡사 앞 은행나무 (5:31)
세렴폭포 가는 꽃길 (6:06)
세렴폭포 지나 사다리병창으로 건너가는 다리  (6:21)   /  사다리병창 길 (5:40)
사다리병창길 안내글(7:06)
말등바위 전망대 (7:29)
앵초꽃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말 "힘들면, 쉬어 가~" (8:36)
비로봉이 가까워지던 곳, 돌아보니 계단도 풍경도 아찔하다 (8:39)
비로소 비로봉 (8:45)
비로봉에서 냉면 먹기 (9:06)
이곳 소나무는 왕실에서만 사용하겠다~ 는 표시(황장금표) (9:40)
황골 삼거리에서 곧은재 가는 길(원통재) (10:33)
민백미꽃(흰쌀을 닮아서 민백미인가?) (11:41)
향로봉 전망대 (12:53)
저어기 오른쪽 높은 곳이 비로봉인가, 종주능선 전망대 (2:43)
이 멋없게 생긴 돌이 이렇게 반갑다니(남대봉) (3:09)
단풍이 아름다워 붉을적 자를 써서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리다가 은혜 갚은 꿩 설화를 따라 꿩치 자를 넣어서 치악산(雉岳山)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상원사 (3:43)
미나리아재비(3:58)
드디어 상원골 주차장 (5:39)
상원골 주차장의 치악산 안내도 (5:41)



[쿠키 글]

 "이 구간은 치악산 종주 코스로서 10시간 이상 소요된다. 따라서 산행 초보자는 무리한 도전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치악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탐방코스 '구룡~향로봉~성남' 아래에 적힌 글이다. 치악산 종주를 계획할 때도 분명히 본 글인데 그때는 왜 '10시간 이상, 산행 초보자, 무리한 도전' 이런 글자들이 진하게 보이지 않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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