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실에 아몬드 브리즈 950ml 한 통, 두유 200ml 여러 개, 구운 계란 여섯 개, 개봉하지 않은 간장 한 병, 냉면 두 봉지, 쌈장 작은 거 한 통, 추억의 도시락 크기 만한 통에 담긴 김치 한 통, 사과 두 개, 오이 한 개, 에너지바와 초콜릿(등산 다녀와서 봉지째 그대로 넣어둔), 유통기한 5일 지난 브리치즈가 있었다. 냉동실에는 얼린 음식 쓰레기 반 봉지가 있었다. 아침으로 오이를 브리치즈에 발라 먹어서 브리치즈와 오이를 해결했다. 얼마 남지 않은 쌈장은 버렸다. 몇 끼 먹을 만큼의 김치가 남았는데 이건 상온에 뒀다가 이번 주말에 남편이 오면 다 먹으면 되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냉장고 코드를 뽑았다.
올해 여름방학 시작하는 날에도 냉장고 코드를 뽑았었다. 한 달 동안 집을 비울 건데 냉장고 혼자 돌아가게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통기한 지난 음식과 소스류는 버리고 먹을 수 있는 건 원주로 갖고 갔었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와 텃밭의 풋고추와 토마토를 따서 먹기도 해야 하고 가끔 주말에 남편이 오면 밥도 해 먹느라 냉장고 코드를 다시 꽂았다. 그러다 가끔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낼 때 이 정도면 냉장고를 굳이 돌리지 않아도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냉장고 코드 뽑기를 미루다 오늘 아침에 다시 냉장고 코드를 뽑은 것이다.
9월부터 정토회 불교대학에 다니고 있다. 정토불교대학은 올해 여름에 불교대학을 졸업한 친구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10년 전쯤에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어보라고 나에게 권했다. 그때 처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접했는데 유튜브가 있기 전이라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팟캐스트로 들었다. 법륜스님의 말씀이 명쾌하고 재미있기도 하여 가족들도 자연스럽게 같이 들을 때가 많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빠져 들어 잠들기 전 매일 틀어놓고 자장가처럼 듣곤 했다. 그러다 보니 종종 "법륜스님이 이렇게 말했잖아"하며 우리 식구들 대화에서 법륜스님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 친구는 종교가 기독교인데 기독교인인 친구가 권하는 불교대학이라면 분명 뭔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랬던지라 불교대학에 다녀보라는 친구의 전화를 받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날 바로 입학 신청을 했다.
정토불교대학은 5개월 과정이며 수업료는 15만 원이다. 온라인으로 법륜스님의 법문을 듣고 생활 속에서 강의에서 배운 것을 실천한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그전 일주일 동안 법륜스님의 법문을 듣고 실천한 것에 대한 소감과 느낌을 온라인으로 도반(학생)들과 나눈다. 이번주 수행연습 주제는 불교와 환경이다. 대중교통이나 도보로 이동하기, 전기제품 콘센트 뽑기, 난방온도 21도 이하로 하기, 세제 샴푸 사용량 1/3로 줄이기, 손수건 행주 걸레 사용하기, 일회용품 사용하지 않기, 텀블러 갖고 다니기, 장바구니 사용하기, 음식 남김없이 먹기, 배달 음식이나 외식 없이 냉장고 파먹기 실천하기, 남은 식재료 확인하고 장보기, 어떤 것도 사지 않거나 꼭 필요한 것은 중고시장 이용하는 소비 다이어트 해보기. 이 13가지 항목 중에서 2가지 이상을 실천해 보기가 이번주 수행연습 과제이다. 13가지 항목들이 모두 평소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것들인데 그중에서 내가 선택한 2가지는 가전제품 콘센트 뽑기와 손수건 사용하기이다.
식구들이 모두 흩어져 사느라 주말 별장이 되어버린 원주집 냉동실에는 어떤 종류의 음식들이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해 본다. 냉장고 코드를 뽑는 행위가 앞으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1회용 비닐봉지를 쓸 때, 물티슈를 쓸 때, 1회용 플라스틱에 음료수를 받아먹을 때, 생수병에 담긴 물을 마실 때 등의 상황에서 내가 갖게 될 죄책감(불편감 혹은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상쇄시켜 주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