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서 텃밭에 나가보는 일이 하루의 즐거움 중 하나다. 며칠 전에 뜯었는데도 상추가 또 빼곡하게 자라있었다. 6시도 되기 전에 텃밭에 나가 상추를 뜯었다. 속으로 숫자를 세며 하나, 둘... 백 정도까지 세니 긴 비닐봉지가 꽉 찼다. 남편이 좋아하는 로메인 상추와 내가 좋아하는 깻잎도 몇 장 뜯어서 위에 같이 넣었다. 비닐에 담긴 상추를 어디에 담을까 생각하다 지난달에 남편과 함께 마음 회복 연수에 가서 받아온 에코백이 생각났다(기념품으로 받은 에코백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환경을 해칠 것 같은 아이러니).
9시쯤 여사님들 휴게실 쪽으로 가니 A 여사님은 보이지 않고 B 여사님이 1층 화장실 앞에서 청소하고 계셨다. "A 여사님은 어디 계세요?" 했더니 "3층이나 4층에 청소하고 계실 거예요" 했다. "상추 좀 뜯어왔는데 두 분 같이 드세요"라고 하며 여사님들 휴게실 문손잡이에 에코백 2개를 걸어두었다. 에코백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함께. 몇십 분 후 화장실로 가다가 B 여사님과 마주쳤다. 여사님이 환하게 웃으며 "상추 저까지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삼월 초에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내게 새로 오신 진로 선생님이시냐고 A 여사님이 먼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온화한 표정에 미소 띤 얼굴이 목사님 사모님 같은 인상이었다. 함께 일하는 B 여사님은 무표정한 얼굴이 어떨 때 보면 화난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번 여사님들과 급식을 함께 먹은 적이 있다. B 여사님은 대화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같이 밥을 먹을 때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A 여사님은 대화 나누는 걸 좋아하셨다. A 여사님과는 학교 안을 짧게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 손주 봐주러 딸네 집에 와있는데 손주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일하고 싶어서 청소일을 하신다고 했다. 이 나이(60대 중반)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는 말과 함께 남편이 교사로 퇴직해서 일을 안 해도 되지만 이렇게 나와서 일하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다.
여사님들 휴게실에도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통기타가 보였다. 누구 거냐고 물었더니 A 여사님이 문화센터에서 통기타를 배우는데 쉴 때 연습하려고 휴게실에 갖다 뒀다고 했다. 지금 이렇게 배우고 일하기를 좋아하시는 것처럼 여사님의 젊은 시절도 그런 것 같았다. 그만큼 A 여사님은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여사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A 여사님이 지난주에 하루 안 나오셨다. 그제 복도에서 마주쳐서 왜 안 나오셨냐고 물었더니 피곤해서 링거를 맞았는데 부작용이 생겨서 죽다 살아났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혹시 집에 상추 키우시냐고 여쭸다. 며칠 전부터 상추가 많이 자라서 좀 갖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안 키운다면서 "아이고 주면 너무 좋지요", 했었다.
여사님들께 상추를 준 다음 날 아침. B 여사님이 진로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활짝 웃는 얼굴로. 토마토 한 봉지를 들고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맞이했다. 상추가 보들보들 하니 정말 맛있었다며 에코백도 잘 쓰겠다고 말했다. 상추고 에코백이고 집에 많아서 드린것인데. 토마토에다 B여사님의 들뜬 목소리와 웃는 얼굴까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