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일기 3화: 감정은 빵반죽이 아니에요

창고에 넣어두고 숙성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by 당근

[누구세요, 누구신데 십 년 만에 문을 두드리시나요]


'들켜버린 기분'이라니.


여전히 인정하긴 싫었지만, 어느 정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어느 정도는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꺼내기 싫어한다는 것을.

평소에는 그것을 꺼내지 않아도 괜찮은 선에서 대화를 했기에 불편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상담을 하는 내내 했던 대화들은 자꾸만 마음속 잠겨있는 문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익숙지 않은 반응들이 튀어나왔다. 말끝을 흐리고, 눈을 피하고, 애매한 대답을 하며..


멍한 눈으로 대답을 할수록, 조금씩 내면의 벽이 만져질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괜찮은 척'하는 외부의 나 속에, 단단하게 벽을 치고 숨어있는, 건드리면 바로 도망치는 연약한 내가 존재했던 것이다.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상담사님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스스로에게 정말 미안해해야 해요."

오랫동안 힘들었던 나를 모른척하고 몰아붙이기만 했던 것을 인정하고 보듬어주라는 말인 것 같았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스스로가 많이 지쳐 있는 상태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지금까지 해온 ‘괜찮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분명 그를 통해 얻은 것도 많았고, 실제로 인격의 성숙함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으므로.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건, 채찍을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좋은 말과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정님, 우리 이성적으로 대화하시죠]


또 한 가지, 요즘 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인 직장 내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번 주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한바탕 늘어놓고 나서, 그럴 때 어떻게 대처했냐는 말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말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으니 보통은 화는 안 내고 참죠.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고, 일 외적으로 부당하게 당한 일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죠. 대신 저한테 있는 신념 중에 하나가, '그래도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라는 거라서요. 제가 당한 일을 누군가에게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에요."


여기까지 대답했을 때, 나는 내 대답에 자부심이 있었다. 세상에, 힘든 일을 겪고도 그걸 남에게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니! 이 얼마나 성숙한가!


그렇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상담사님은 여기에 호락호락하게 수긍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처 방식이 '나를 지키는 방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은 상담사님이, 듣고 천천히 생각해 보라며 질문을 다시 던져주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갑자기 한 대 얻어맞았다고 해 봅시다. 정말로 갑자기요. 그러면 기분이 어때요?"

"음.. 당황스럽겠죠. 화도 나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 사람에게 '왜 때려!'하고 항의를 하던가, 아니면 같이 한 대 쳐줘야죠. 그게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반응 아닌가요?"

"어.. 그럴지도요? 그렇지만 때리는 건 좀.."

"그래요. 같이 때리지는 않는다고 쳐도, 누군가가 공격을 했는데 거기다 대고 '음. 나는 앞으로 다른 사람을 때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으면, 뭔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왜 맞은 건 난데, 나에게 숙제를 하나 더 쥐여주는 거예요?"

"그건 좀.. 웃기긴 하네요. 하지만.. 그럼 어떻게 해요? 바꿀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데. 반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은 바뀌질 않을 텐데."

"그러면, 그렇게 다짐을 하고 나서 화가 풀렸나요? 해결이 되었다고 느꼈어요?"

"어....... 화가.. 덜 풀리긴 했죠? 아주 천천히 풀리는 중이지 않을까요?"

"아니죠. 화를 못 풀고 속에다 가둬놨으니까 점점 더 커졌겠죠. 50의 스트레스를 누군가 나한테 줬어요. 그러면 그걸 제 때 풀어내면 50으로 끝났을 텐데, 그렇게 못하고 속으로 눌러놓으니까 점점 더 커져서 100, 300까지 가는 거예요. 감정은 본능적인 거라, 생각한다고 해서 풀리는 게 아니에요."


이때까지는 솔직히 무엇이 잘못된 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오랫동안 사용해 왔고, 맞는 길이라 여겨왔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니.

그동안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잘 승화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내 속에서 발효되어 부풀고 있었다니.


[성숙한 사람이 되려다 분노를 숙성시켰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겉으로 화를 내지 않으며 지내왔다.

참는 것이 미덕이요, 화내는 사람은 인성이 덜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부당하게 화내는 이에게 최고의 대응은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직업란에 '간호사'가 아니라 '성인군자 지망생'이라고 적었어야 했나 보다.


'자, 지금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아. 그리고 별로 효과도 없을걸? 저 사람도 뭔가 이런이런 사정이 있었겠지.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나도 이러저러한 점은 잘못했을지도 몰라. 아, 다르게 행동해 볼걸. 그럼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나저나 저 사람은 왜 말을 저렇게 하지? 그런 건 미성숙한 행동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다음에 저렇게 행동하지 말아야지! 그러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면 괜찮아지겠다!'


여기까지가 차오르는 화를 막아내기 위해 내가 활용한 방식이었다. 이성적으로 합리화하기.


차라리 노래방에 가서 소리를 질렀으면 짧고 굵게 해결되었을 일을, 실제론 저것보다 훨씬 길고,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무수한 생각들로 감정을 나무라며 막아 세우고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풀리지 못한 화가 이성에 덮인 채 점점 더 쌓여, 나중에는 사람들의 별 일 아닌 반응에도 크게 날을 세우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상대는 그 정도로 나쁜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이미 내 억울함은 커질 대로 커져 있었으므로.


당시의 나는 내가 키워온 감정들이 내 눈을 가리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저, '직장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굴까. 나는 왜 이렇게 오해를 받을까.' 하며 하염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슬퍼했었다.


아무리 그동안의 경험과 맥락이 쌓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입 밖으로 말을 꺼냈거나 실제적 행동을 하지 않은 이상 해석에는 나의 주관적 판단이 어느 정도 섞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인정해야 한다.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데 내가 일조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운동을 하고, 직장 동료와 따로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놀러 다니는 등 후속 처리를 해도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고 있으니 결국 스트레스가 계속해서 쌓였던 것이다.


후속조치만 늘릴 것이 아니라, 이를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를 바꿔야 한다.


이번 상담은 내가 갖고 있던 여러 신념과 기준들을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

그것이 편한 경험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의 반발심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사에 진지하고 무겁게 살고 있던 나도 이제는 좀 가볍게 살 수 있을까?라는 기대가 조금씩 피어올랐다.


어쩌면 상담을 하며 느끼는 불편감이, 부정적 신호가 아니라 '이제는 행복하게 살아 보자'라는 감정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도 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