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벨기에 수도세 폭탄
유럽에서의 수도세가 날아왔다. 엄청난 금액이 청구되었다.
660유로. 이걸 대한민국 원으로 환산하면 거의 1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벨기에의 수도세는 매달 청구되지 않아서 얼마큼 사용했는지 모르는데, 6개월 만에 청구된 금액이 저러했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습관대로 물을 쓰다가 수도세 폭탄을 맞은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벨기에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설거지를 할 때에도 물을 틀어놓지 않는다고 한다. 샤워할 때에도 꼭 필요할 때만 물을 쓴다고.
게다가 우리는 매일 집에 있었기 때문에 설거지도 식기세척기로 매일 했는데, 이것도 의심이 되었다. 또 우리가 처음 이사 왔을 때 보일러가 터져서 물이 샜는데 그게 우리 집으로 청구된 건 아닌지 의심되었다. 이것도 저것도 의심되는 상황 속에서 정신이 혼미한 그때, 아내가 다가와 이야기했다.
"나, 임신했어."
그렇게 아내가 임신했다. 수도세 폭탄이 터진 날 확인한 임식 소식이라 태명을 카트라이더의 물폭탄이라 지으려 했다가 아내가 기겁해 내 생각을 내려놓고, 병원 예약을 잡았다.
모든 것이 느린 벨기에에서는 병원 예약 한 번 잡기도 힘들다. 가정의학과에 가서 피 검사를 하고, 피검사는 그날 저녁 나온다 하더니, 다음날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검사 결과가 뜨지 않았다. 검사 결과가 멈춘 거다. 비로소 멈추면 보이는 나라 벨기에는 항상 이렇다.
체류증을 받을 때도 그랬지. 바쁘지 않을 때는 2주면 나오는 체류증이, 성수기에는 한 달도 더 걸린다. 심심하면 멈추는 나라라서 그렇다. 그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생긴다.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꼭 좋은 거라는 법은 없었지만.
드디어 결과가 제대로 나왔다. 하지만 호르몬 수치만 뜨고 임신인지 아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가정의학과 의사 선생님이 알려준 수치에 의하면 대략 5주차 정도로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내는 명확한 설명을 원했다. 그래서 검사 결과를 알려준 기관에 전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자기는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자기는 그냥 검사 결과만 알려주는 거지 이게 임신인지 아닌지는 알려줄 권한이 없다고 했다.
드디어 다시 가정의학과에 갔다. 산부인과는 바로 갈 수 없었다. 벨기에는 그런 나라다.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게 혈압과 몸무게를 재주었다. 그리고 임신 5-6주차인 거 같다는 이야기를 드디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산부인과 연결을 해주었는데, 산부인과에서 전화를 계속 안 받는 거다. 의사 선생님은 종종 이런 일이 있다며 끝까지 전화를 기다렸는데, 이것이 바로 벨기에 사람의 인내인 거 같았다.
전화로 예약을 잡아주고, 나중에 산부인과에 갈 때 필요할 거라며 추.천.서.까지 밀봉해서 우리에게 건네준 의사 선생님은 천사였다. 물론, 산부인과 갈 때 의사 추천서가 있어야 하는 벨기에는 이해가 안 가는 나라였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독감에 걸려서 응급실에 갔다가 간호사한테 혼났었지. 나도 문에 찧어 발톱이 나간 뒤에 병원에 갔다가 혼났었고. 벨기에는 간호사가 환자를 혼내는 나라다. 병원이 갑이고 환자가 을인 나라.
아내가 입덧을 시작했다. 부모님과 통화할 때 그렇게 자신 있게 자기는 입덧 안 하는 거 같다고 하더니 입덧을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입덧 같은데 아내가 자기는 입덧 안 하는 거라며, 입덧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했다가 결국 입덧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는지, 비행기 타고 왔을 때 겪었던 멀미보다는 안 힘들다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의 좌충우돌 임신기가 시작되었다. 뭐, 내가 임신한 것은 아니지만.
아내는 계속, "남편이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면 남편도 같이 입덧을 한다던데"라면서 입덧을 안 하는 남편에게 사랑하는 게 맞느냐 묻기 시작했다. 이거, 입덧하는 척을 해야 하나 싶었다.
아기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좌충우돌 중이라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얼마나 좌충우돌일지 걱정이지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면 되니까. 걱정해서 바꿀 수 없는 일은 굳이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좌충우돌 사고치면서 아기가 태어나길 기대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