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리더의 수준이 그 모양인 이유

by 초덕 오리겐

Intro


1811년, 조제프 드메스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Toute nation a le gouvernement qu'elle mérite.


정치에 환멸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을 좀더 설명하자면, 1859년의 자조론에서 새뮤얼 스마일스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부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영한다. 국민보다 수준이 높은 정부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국민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지게 마련이다. 국민보다 수준이 낮은 정부가 장기적으로는 국민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지듯이 말이다. 한 나라의 품격은 마치 물의 높낮이가 결정되듯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법체계와 정부 안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고상한 국민은 고상하게 다스려질 것이고, 무지하고 부패한 국민은 무지막지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자조론》, p.29



작은 대한민국 사회


교회는 작은 대한민국과 같다. 특히나 그 정치 방식에 있어서 교회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흡사하다. 특히나 장로교 정치가 그렇다.


물론 간혹 장로교 정치 체제가 아니라 회중 정치를 하고 있는 교회들도 볼 수 있다.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권위를 행사하는 정치 체제인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진행이 되지 않거나 목사가 독재하기 쉬운 정치 체제이다.


아무도 교회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고, 공동의회가 있을 때(투표할 때)마다 1시간 가까이 늦게 집에 가야 하며, 중구난방으로 흩어지는 의견들 때문에 피곤해 죽겠는 상황에서 강력한 스피커인 목사에게 상대적으로 표가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장로교 정치 체제에서는 장로와 같은 분명한 책임자가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심지어 목사와 의견이 다른 경우가 너무 많아서 장로파와 목사파로 갈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회중 정치에서는 분명한 책임자를 선출할 때에도 목사의 입김이 아주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결국 교회가 원맨쇼로 바뀔 소지가 크다.)


그래서 내 주변에 회중 교회에서 사역했던 많은 사역자들이, 회중 교회가 목사 1인 독재로 빠지기 훨씬 쉽다고 우려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 소리를 듣고 나도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권위자가 없으면 목소리 큰 사람 의견이 훨씬 쉽게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조별 과제를 해보았거나, 그 외의 공동체 활동을 조금이라도 해보았다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장로교는 작은 대한민국과 같다. 투표로 장로와 집사, 권사를 선출하고, 또 선출된 사람들이 각 부서의 책임자를 임명한다. 주일학교 교사와 같은 봉사자를 세울 때에도 부장 집사와 같은 임명된 부서장이 독단적으로 교사를 임명할 수 없고, 선출된 사람들의 모임인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등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리더가 세워지는 방식과 리더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때때로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아마도 대한민국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도


처음 전도사가 되었을 때 항상 의문이었던 것이 있다. 무엇이냐 하면, 설교 내용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사역했던 교회는 오래되고, 성도들이 신앙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교회이기는 했다. 자기들 수준에 안 맞는 사역자를 세우기 싫어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중에서도 교사들이 자주 했던 말 중에 하나가 이것이었다. 우리 부서 지도교역자는 항상 목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도 주기도문이 아니라 축도로 마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십 년 동안 항상 목사가 있던 자리에 햇병아리 전도사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 신대원에 들어가, 동시에 처음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던 때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얼마 전에도 통화 중에 같은 기숙사에 살던 친구가 "너 그때 진짜 엄청 열심히 사역했잖아?"라고 했는데, 같이 살던 모두가 알 정도로 열심이었다.


신대원에 처음 입학하면, 1월과 2월에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강좌가 있다. 거의 하루종일 이루어지며, 매일 시험이 있고, 그것을 두 달 가까이 진행한다. 이때는 한 방에 네 명이 기숙사를 같이 쓰는데, 그때 나는 총신대를 같이 졸업한 동기들과 함께 살았다.


이때, 친구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방에 돌아와서 시험을 위해 밤 9시, 10시까지 공부하곤 했었다. 그때 옆에 있던 나는 헬라어, 히브리어 공부는 10-20분 정도만 하고 그 이후 시간은 모조리 설교 준비에 투자했었다. 일주일 내내 말이다. 심지어 다른 친구들은 자러 들어가는 순간에도 불을 켜고 공부했었다.


그 모습을 봤던 친구들의 반응이 기억난다. 첫째는, 도대체 무슨 교회길래 설교를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냐는 거였다. 둘째는, 공부는 하나도 안 하나는데 어떻게 맨날 만점 받냐는 거였다. (사실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문법은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복습과 단어 암기를 다 끝내곤 했었다) 그래서 질투와 시기심에 설교 준비하는 걸 방해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내팽겨치고(?) 설교만 일주일 내내 준비했음에도 교사들의 반응은 신랄했었다.




사역자의 성장 방향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다. 워낙 설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명한 목사들 설교를 열심히 듣고서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그대로 전달했었다. (설교문 전체를 베껴서 읽은 게 아니다.)


그중에서도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스티븐 호킹은 온몸이 만신창이이다. 하지만 그 머리가 위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티븐 호킹을 보고 위대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 교회는 만신창이와 같다. 그러나 그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위대하다.


설교가 끝난 뒤에 들은 소리는 이것이었다. 스티븐 호킹이 기독교인도 아닌데 어떻게 설교 중에 스티븐 호킹을 위대하다고 할 수 있냐는 거였다.


유명한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설교했던 강력한 메시지들을 설교할 때마다 그 내용을 가지고 비판을 받았다. 그때 깨달았다. 이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메시지 내용이 아니라 메신저구나. 그러니까 어려 보이고, 목사도 아닌 사람이 와서 설교를 하고 있으니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80-90년대 목사들은 아무리 가난하고 못 먹어도 옷차림에 엄청 신경을 썼다. 명품을 입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부티나게 입으려 노력했다. 자동차도 최대한 비싼 자동차를 탔다. 그 이유는, 복을 전달하는 목사가 가난한 티를 내면 성도들이 설교를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90년대부터 2000년대에는 목사들이 스펙 쌓기를 시작했다. 어디 외국에서 목회학 박사 한 줄이라도 더 쓰려고 그렇게 찾아다녔다. 지금에는 K-D-Min이라는 이름의 학위를 가지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만 주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데다가, 한글로 공부하는데 이게 무슨 유학이냐는 것이다. (사실 돈만 주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배우러 갔다면 말이다.) 그러나 목사들이 왜 이렇게 학위에 집착을 했느냐 하면, 고학력의 성도들이 저학력의 목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교수라는 사람들이 목사의 설교를 무시하고 까내리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설득력 있고 감성을 터치하는 설교라고 감탄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이 어이없었던 게 기억난다. 그들이 그렇게 비난했던 이유는 목사의 설교가 문제가 아니라, 목사의 학력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목사는 미국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고 왔었다.)




내용이 아니라 포장지


그러니까 많은 경우에 설교에 대한 성도의 비판은 내용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도들의 관심이 내용이 아니라 포장지에 가 있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해서, 성도들의 요구가 설교의 내용이 아니라 목사의 스펙과 포장이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들은 당연하게도 내용이 아니라 포장지를 바꾸게 되어 있다. 아무리 설교 내용을 가다듬어도 듣지를 않는데, 듣게 하려면 포장지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목사의 설교를 안 들으면 목사는 비싼 옷과 비싼 자동차를 찾게 되어 있다. 저학력 목사의 설교를 안 들으면 목사는 학위 장사를 하는 학교를 찾게 되어 있다. (사역 중에 공부에 매진할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이 꼭 이러하지 않은가? 젊은 목사들이 스펙을 찾아서 대형교회에 몰린다. 작은 교회, 지방 교회, 시골 교회에 가면 미래가 막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큰 교회에서는 작은 교회 출신 목사들을 뽑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한때 나에게도 어떤 선배 목사가 충고한 적이 있었다. 지금 서울 대형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으니, 엄한 생각하지 말고 다음 사역지는 ㅅㄹ의 교회 같은 대형교회를 찾아보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작은 교회로 옮겼다.) 그래서 스펙 생각하지 않고 정말 사명감에 작은 교회를 찾아간 사역자들은 마흔이 되어 갈 곳을 잃고 만다.


또한 오늘날 젊은 사역자들을 보면 말씀 연구에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좋아할 법한 포장지를 찾는다. 왜냐면, 그것이 사람들이 들어주고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며


요즘 한국 교회에 존경할 만한 리더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존경할 만한 목사들이야 많다고 생각한다. 진흙 속에 숨어 있는 진주 같은 목사들을 지금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와 같은 책을 읽고, 스펙이 아니라 내면 세계를 성장시키는 사람들은 아직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처럼 한국 교회가 유명한 사람들, 고학력의 목사들, 대형교회 출신 목사들 같은 포장지에만 계속 신경을 쓴다면, 한국 교회 목사들의 성장 방향은 계속 그쪽으로만 향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물론 남겨진 진주 같은 목사들이 많이 있겠지만, 한국 교회의 요구가 항상 포장지로 가 있다면, 건강한 목사도 어쩔 수 없이 포장지를 찾게 되는 경우가 늘어난다.


물론, 우리에게는 뛰어난 고학력 신학자도 필요하고, 대형교회에서 잘 훈련된 목사로 필요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작은 교회에서 잘 훈련된 목사와, 학위보다 성경 공부에 매진한 목사도 필요하다.


뭐, 그도 아니면 항상 그래왔듯 목사에게 둘 다를 갖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장지도 있고 내실도 있는 목사가 많으니, 둘다 갖추면 안 되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포장지를 갖추기 위해 목사에게 몇 년을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말로만 둘다 갖추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은 뒤로한 채, 겉으로 보이는 스펙에만 치중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사역자를 내면이 아니라 외면에 치중하게 만들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는 작금의 한국 교회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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