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대한 시리즈는 아래의 링크에 계속해서 올라갈 예정이니, 이번 시리즈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보면 어떤 사람은 율법이 구약 때 폐하여졌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율법은 나쁜 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먼저, 율법을 싫어하는 사람은 율법이 우리가 하기 싫은 것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교통법규를 준수하는 것, 다른 사람을 폭행하지 않는 것과 같은 우리 사회의 법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구약 때 폐하여졌을까요?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율법이 구약 때 폐하여졌으니, 이제 전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은, 이미 율법은 사라졌으니 마음대로 율법을 범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건 마치, 아버지가 저에게 “동생 때리지 마”라고 말하셨는데, 시대가 바뀌었었으니 이제 동생을 마음대로 때려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글을 확인해주세요.)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언제 율법이 완성됩니까? “동생을 때리지 말라”는 명령이 무색하도록 형과 동생이 사이좋게, 서로 사랑할 때 율법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8-10]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으며,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바울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굳이 "살인하지 말라"라는 율법이 없어도 살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거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맥락을 살펴보면, 율법이 무엇인지 좀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청혼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출애굽기 20-24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식, 곧 결혼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언약식의 가장 처음, 20장에 십계명이 등장합니다. 즉, 남편과 아내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지켜야 하는 사랑의 약속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결론적으로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지키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십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네 결혼식으로 바꾸어 설명하기 더욱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결혼할 때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기로 서약합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때리지 말아라, 바람피지 말아라, 거짓말하지 말아라와 같은 것들은 부부가, 또는 연인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기본적으로 지키는 것들입니다. 즉, 사랑한다면 배우자를 때리거나 바람피지 않습니다.
반대로 만약에 집에 안 들어오고 배우자를 때리고 가스라이팅을 한다면, 이 사람이 배우자를 정말 사랑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배우자를 사랑한다면, 배우자를 사랑하는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율법의 요약은 십계명이고, 이것을 예수님은 두 가지 대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마음 속으로 예수님을 믿어”라고 말하면서 성경도 안 읽고, 교회도 안 나오고, 헌금도 안 한다면 과연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친구를 때리고, 목사와 장로 뒤에서 욕하고, 권사와 집사들을 비방하고, 자녀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는다면 이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려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연인을 사랑한다면 행동이 나옵니다. 칭찬을 하거나, 선물을 주거나, 봉사를 하거나, 시간을 할애하거나 그 사람을 위한 행동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께 시간과 노력, 재산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서 시간과 노력, 재산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만약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이 사람 안에는 사랑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야, 너 새벽예배 또 빠졌어?” 이런 식으로 억지로 시킨다면 율법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포스팅에서는 율법주의에 대해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