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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May 17. 2024

욥기 2장 1절-10절 묵상

까닭없이 찾아오는 고난

본문 관찰


2장부터는 다시 천상 회의가 시작된다. 사실상 욥기의 서론에 해당하는 욥기 1장과 2장의 구조는 A-B-A-B-A의 구조이기는 하다. 간단하게 살피면 아래와 같다.


A. 의인 욥

B. 천상 회의 1

A. 의인 욥의 고난 1

B. 천상 회의 2

A. 의인 욥의 고난 2


그리고 3절을 보면,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라는 문구를 살필 수 있다. 즉, 욥의 고난은 이유 없이 찾아온 고난이다. 다시 말해, 욥이 죄를 지어서 징계하는 차원의 고난이 아니라는 소리다.


4절을 보면, 소유(having)보다 생명(being)이 더 귀한데, 생명(몸)을 치지 않아서 아직까지 욥이 온전하다고 사탄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사탄은 주장하기를, 욥의 몸을 치면 욥이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한다.




해석


1.

고난이 다가왔을 때, "내가 이 모양이라서 고난이 찾아온 거야"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어려움을 겪으면 죄책감에 빠지거나 낙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까닭없이 주어지는 고난이 있다. 고난을 겪는다고 꼭 죄책감에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2.

소유(having)보다 생명(being)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부자여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건강은 돈 주고 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하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면 건강이나 돈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3.

욥의 몸을 치면 본색이 드러낼 것이라고 사탄은 말한다. 즉, 누군가의 신앙과 성품은 그 사람의 고난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신자들은 순교자를의 신앙을 매우 높게 쳤다. 생명을 위협하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용


1.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는 죄 가운데 빠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그게 꼭 죄가 원인인 것은 아니다. 물론, 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항상 고난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고난을 겪을 때마다 항상 죄책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죄를 저질렀을 때, 죄책감의 종노릇을 해서도 안 된다. (물론 범죄를 저지른다면 제대로 된 형벌을 받아야 한다.) 반대로, 고난이 없다고 해서 죄를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좀더 다루어볼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1) 죄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 죄 때문에 낙심에 빠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 부분에 있어서 동성애 문제는 인상적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1) 죄를 정당화하는 것과 2) 낙심에 빠지지 않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이 낙심하니, 동성애자들을 정죄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교회는 불륜한 사람들, 포르노에 넘어지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지 않느냐고 묻는다.


물론 기독교는 간음을 죄로 여긴다. 포르노와 불륜도 죄로 여긴다. 하지만 교회 내에 있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을 뿐이다. 즉,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는 동성애 또한 간음과 비슷하게 본다. 그래서 넘어지고 싶지 않지만 성적 유혹으로 자주 넘어지는 청년이나, 넘어지고 싶지 않지만 동성애로 자주 넘어지는 청년을 비슷하게 바라본다. 즉, "동성애가 뭐가 문제인데?"라고 말한다면 "스와핑, 폴리아모리, 로리콘이 뭐가 문제인데?"라고 말하는 사람을 비슷하게 바라본다.


여기서 우리는 동성애 지지자들이 교회에 대해 "동성애자를 정죄하지 말라고 주장하면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논리적으로 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동성애자를 정죄하지 않는 것과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리하면, 동성애 지지자들이 말하는 "다른 죄는 왜 정죄하지 않느냐"는 소리는 허수아비 논법에 비논리이다. 왜냐면 교회는 다른 죄를 정죄하되 사람은 정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살인자는 정죄하되 살인 충동이 있는 사람(사이코패스)은 정죄하지 않는다. 다만 질병이니 고쳐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동성애는 정죄하되 동성애자는 포용한다.


다만 다른 죄와 동성애의 차이가 있다면, 다른 죄는, 그것을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기독교가 "불륜이 죄다, 사람을 죽이는 건 죄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차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성애만큼은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교회가 "동성애는 죄다"라고 말할 때 이것을 차별이라고 말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죄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면 될 뿐이다. (물론 범죄를 저질렀다면, 형벌이 뒤따를 수 있다.)


2.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생존, 의문, 세련의 단계가 있다. 그런데 이건 마치 being(생존)보다 having(세련)이 고차원인 것처럼 말한다. 이 시대의 문화가 그러하다. 폼생폼사라고, 폼 나는 삶이 생존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카푸어 같이, 비싼 차를 끌고 폼나게 살면서 자기 인생을 망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한국 교회 안에도 많다. 생명보다 남에게 얼마나 세련되게 보일지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 많다. 본질보다 비본질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의 관심사를 되살펴야 한다.



3.

고난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드러난다. 그러나 고난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참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고 시험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시험이 찾아온다면 그 시험이 우리의 신앙을 정금처럼 단련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좀더 명료하게 말하자면, 고난이 찾아와 내 신앙이 거짓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우리가 신앙을 잃어버리고 넘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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