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하여
발작버튼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과거에는 역린이나 아킬레스건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평소에는 굉장히 친절하고 착한 사람인데, 어떤 점을 자극하면 갑자기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즉, 그 사람의 인격을 보게 해주는 약점 같은 곳을 발작버튼이라고 부른다.
누구에게나 발작버튼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한다. 문제는, 각자가 가진 발작버튼의 위치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버튼을 잘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때로는 이 발작버튼이 너무 쉽게 눌리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또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눌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으로 이해할 만한 부분들에 발작버튼이 존재한다.
이러한 발작 버튼을 눌렀을 때 우리는 상대방의 반응에 당황할 수 있다. 그때 그냥 "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말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발작버튼은 이것이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은 발작버튼에 논리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면, 상대방이 그냥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다.
나는 관계에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어렸을 때는 생각해보면, 사실 내가 관계에 종노릇하는 면이 있었다. 아무도 나를 옭아매지 않았지만, 스스로 종노릇을 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나 기독교인 중에 착한 사람 증후군이나 관계에 종노릇 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감정적으로 착취하거나 가스라이팅 하면서, "교회 다니는데 왜 그렇게 행동하냐"고 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굳이 관계에 종노릇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쉽게 사람들을 손절한다는 점이다. 물론, 내가 그 사람에게 "절교하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계에 종노릇하지 않으면서,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사실이다. 이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내가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다시 고민해보게 되었다.
위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다른 사람을 정서적으로 착취하거나 꼽주는 사람에 대하여 나는 매우 신랄하게 평가한다. 물론, 꼽 주는 사람이나 사람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들거나 하는 사람들과 굳이 관계를 이어갈 필요는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착취당하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들과 은근히 관계를 이어가지 않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겉으로는 아무리 젠틀한 체한다 해도, 은연중에 사람을 무시하는 자세가 있으면 될 수 있으면 관계를 이어가지 않았다. 이런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헤게모니(주도권) 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러한 인간관계는 피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역자가 관계의 우월성을 가지기 위해 헤게모니 싸움을 한다면 그것처럼 웃기는 일도 없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헤게모니 싸움을 하는 사람과는 그냥 관계를 끊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역자들 가운데에도 헤게모니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헤게모니를 쥐지 못하면 싸움을 걸거나 욕하는 사람도 있다. 재미있는 건 그 사람들이 사역을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관계의 역학을 잘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목사도 사람이다.)
아무튼, 나의 <관계를 끊는 버튼>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자세이다. 보통 이것은 말에서 나온다. 아무리 예쁘게 포장을 해도 숨길 수 없다.
우리에게는 말문을 열게 하는 버튼이 있다. 많은 경우, 발작버튼과 비슷하기도 하다. 정치 이야기가 그 한 예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주제는,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상대방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작품에 대한 것도 우리의 말문을 열게 한다. 소설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자동차 등에 대한 마니아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가 나올 때 말이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직업이나 전공에 따라서도 말문을 열게 하는 버튼이 있다. 신학생들에게 소명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특히나 엠티 같은 곳에서 말이다. 서로 나눔 시간 총 30분이 주어진다면, 혼자서 20분이 넘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신학생들에게 신학 이야기를 하면 대개는 열을 내고 말하게 된다. 특히나 교단마다 신앙은 같지만 신념이 조금씩 다른데, 이 부분을 건드리면 흥분해서 말싸움이 되기도 십상이다. 아무래도 신학생들의 관심 분야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직업이나 전공에 대해 물어보면 끝없이 말이 나오게 된다. (백종원에게 음식에 대해, 강형욱에게 개에 대해 물어본다고 해보자.)
그래서 나는 보통 사람들에게 다양한 걸 물어본다. 그 사람의 관심분야나 전공에 대해 묻기도 한다. 특히나 평소부터 내가 관심이 있었던 것들을 질문하는 편인데, 질문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간단하지만 전공자 입장에서는 워낙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물론, 비전공자는 닥치고 경청해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때 나의 <관계를 끊는 버튼>이 활성화되는 경우가 잦다는 거다. 나는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서 질문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훨씬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헤게모니를 잡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자세가 디폴트라면, 자기도 모르게 주도권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이제사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어머니가 결벽증이 있었다. TV에 묘사되는 사람들처럼 심각한 건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보는 깔끔떠는 여자 정도의 결벽증이 말이다. 뭐, 보통 여자들이 다 이럴지도 모른다. 과거 <남녀생활탐구>라는 프로그램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이를 재미있게 그렸는데, 그때 나왔던 <깔끔 떠는 여자>와 <더러운 남자>에 대한 비교가 인상적이었다. 아마, 작중에 나오는 <깔끔 떠는 여자> 수준의 결벽증이 아닌가 싶다. 집 밖에서 화장실 가는 걸 찜찜해 하고,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나 버스 안의 손잡이는 더럽다고 생각하는 정도 수준의 결벽증이다.
그런데 결혼했더니, 아내도 결벽증이었다. 아내도 집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찝찝해 하고, 물티슈를 가지고 다니면서 더러운 걸 만졌다 생각하면 그것으로 닦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어머니와 아내가 가진 청결 버튼, 즉 더럽다고 느끼는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내와 장모님의 청결 포인트도 달랐다.
사람마다 살림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은가? 미국과 벨기에 등에서 혼자 살림을 하던 아내가 처가댁에 있거나 시댁에 있을 때 불편해하는 점들을 보면 살림에서 무엇을 중요시 보는지, 어떤 점에서 결벽 버튼이 눌리는지가 다 다른 걸 볼 수 있다.
사람마다 발작 버튼이 다르고, 결벽 버튼이 다르고, 말문을 열게 하는 버튼이 다 다르다. 그런데 나와 다른 것을 가지고 "이상하다" 라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해해보자" 라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예전에 유행하던 시트콤에서는 이런 다른 점들을 개그 요소로 그렸을 지언정,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줬는데 지금 세대에는 그런 게 부족한 거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