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능력
항상 느껴왔던 거지만, 대화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히나 토론을 할 때,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상대방의 의도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표현에만 집중하여 말꼬리를 잡는 거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A: 밥 먹었어요?
B: 아뇨? 피자 먹었는데요? 피자는 식사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A: 아뇨, 식사 하셨냐고요.
B: 식사하셨냐고 물어본 게 아니라 밥 먹었냐고 물어봤잖아요. 한국인은 밥을 먹어야 식사를 했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A: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B: 그렇게 생각하신 거에요. 밥 먹었냐고 물어본 거잖아요. 밥 아니면 식사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 어질어질하다. B 같은 사람과 대화를 한다면 대화가 피곤해진다. 왜 관례적으로 "밥 먹었냐"는 질문이 "식사했느냐"가 되는지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설명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일축한다면 대응이 어려워진다. 밥 외에는 식사가 아니라고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다며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다"라고 해도 "네 표현과 의미는 일심동체와 같다"면서 표리부동한 사람으로 모는 순간에는 어이가 없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의도와 생각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을 가리켜 커뮤니케이션 능력, 소통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때로는 영어를 잘 못해도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면, 영어를 잘하는 사람보다 외국인의 말을 더 잘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 번은, 저녁 시간이 되어서 외국인 친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친구가 "Have you eaten rice?"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 친구의 나라를 생각해서 '아, 이 친구가 식사 했냐고 물어보는 거구나'라고 캐치한 적이 있다. 이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한 번은, 외국인 친구들과 길을 가는데 신호등이 빨간불인데 친구가 걸어가는 거다. 그래서 "Blue light(파란불)"에 걸어가야 하지 않느냐, 빨간불인데 왜 건너느냐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때 Green light 대신 Blue light을 사용한 것은, 과거 초록 신호등을 파란불이라고 불렀던 습관에서 나온 거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친구라면, "아, 너네 나라에서는 초록불을 파란색이라고도 불렀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다. 빨간불이 아니라 파란불에 건너라고 하고 있으니, 일단 상대방이 "너 지금 불법을 저지르고 있어"라고 주장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영국과 같은 나라들은 빨간불이어도 차가 없으면 건너도 된다. 이것은 전혀 불법이 아니다. 이것 또한 해당 문화를 알지 못한다면 불통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Have you eaten rice"를 듣고서 상대방의 질문을 캐치하지 못할 수 있다. "파란불에 건너야 해"라는 말을 듣고 "저건 초록불이니까 건너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상대방의 문화를 모를 때 발생한다. 커뮤니케이션(소통)이 안 되고 있는 거다.
여기서 불통을 다시 소통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문화와 언어 습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밥 먹었니"라는 말과 "파란불에 건너야 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해당 문화에 대한 상식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을 잘 이해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혹자는 상대방의 문화를 모르든, 행간을 읽을 능력이 없든, 상식이 부족하든, 상대방의 언어 습관을 이해하지 못한 거다.
자, 한국인이 영국인 친구가 빨간 불에 건너는 걸 보고 이렇게 말한다고 해보자.
A: 이거 빨간불이잖아. 파란불(Blue light)에 건너야지.
B: 불법? 파란불? 무슨 소리야?
A: 빨간불에 건너면 불법이잖아.
여기서 다음에 올 B의 대답을 보자. 불통이 일어나는 대답은 아래와 같다.
B: 빨간불에 건넌다고 불법이라니. 너 바보냐? 그리고 파란불이 뭐야. 눈에 장애가 있냐?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지는 대답은 아래와 같다.
A: 한국에서는 빨간불에 건너면 불법이구나. 영국에서는 차만 없으면 건너도 되는데.
서로 이해가 안 가는 상황에서 소통을 일으키려면 상대방의 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빨간불에 건너도 불법이 아니다)에 갇혀 있으면 상대방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능력이다. 남에게 쥐뿔도 관심이 없고 내 생각만 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럴 경우에는 현상적인 표현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러면서 "의도는 표현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면서 상대방의 의도를 어떻게는 왜곡하려고 한다. 즉, 상대방의 의견은 개뿔도 중요하지 않고 표현에만 목을 메는 것은, <표현은 의도/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인 것을 잊고 목적 전도를 일으킨 거다.
그런데 불통을 일으키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상대방의 표현의 말꼬리 하나를 붙잡고 "의미부여"를 한다. 상대방이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거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야"라고 해도 "그렇지만 네 표현을 보면 너는 그런 의도라고 나는 생각할 거야"라고 주장하는 거다. 맨 위의 "밥 먹었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발화자는 전혀 "한국식 밥을 먹지 않으면 밥을 먹은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표면에 "밥"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너는 한국식 밥을 먹지 않으면 식사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라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서 비난하는 거다.
인터넷상에서 다른 사람의 말에 시비를 걸고 따지는 사람들을 보고 깨달은 것이 있다. 소통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라는 생각이다. 상대방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놓고 말하기를, "너는 이렇게 표현했으니 네 의도는 이거야"라고 주장하는 거다. 그런데 심지어 상대방이 "내 의도는 그게 아닌데?"라고 해도 끝까지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소통할 의지가 없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쇠 귀의 경 읽기 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옳고, 좋은 말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이해할 생각이 없으면 설득할 방법이 없다. 끝까지 오해를 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도 없다. 단지, 상대방의 지적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거다.
타진요 사태도 그렇지 않았는가.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기 싫으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나는 믿지 않겠어"를 똑똑함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게 똑똑한 게 아니라 불통의 근거가 된다. 즉, 무식함의 근거가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