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드는 비야 데 레이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으로
대견해, 칭찬해
어제 오후 걸어 올랐던 길을 자전거로 달렸다. 반이나 올라왔을까. 배낭으로 가려진 등 뒤가 뜨끈해질 때쯤, 페달을 힘차게 구르던 허벅지 앞 근육이 딱딱하게 뭉쳐 한계를 토로했다. 다리 두 개가 이렇게 무거운 존재였다니.
연신 뒤를 돌아보며 길옆으로 펼쳐진 풍경을 턱짓으로 손짓으로 가리키던 때는 정말이지 순간이었다. 쏟아지는 땀에 겨드랑이며 등이며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엉덩이도 마찬가지였다. 칼칼한 목구멍에서 비릿한 맛이 절로 올라오자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내려가자.”
이견 없이 자전거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마을 어귀까지 내려온 우리는 알 수 없는 골목길로 무작정 내달렸다. 드문드문 위치한 주택과 정돈되지 않은 거친 풀밭이 보였다. 마을은 고요했고 거리에는 어른도 아이도 없었다. 인기척에 지붕 위에서 고개를 빼고 짖어대는 개 몇 마리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염소 몇 마리가 우리가 만난 살아있는 존재의 전부였다.
추적이는 비도, 자동차 소음도, 파스타와 피자가 가득한 거리도 없는 비야 데 레이바.
비야 데 레이바에는 전망대라 부를 수 있는 높이 즈음에 하얀 ‘예수상’이 하나 있다. 누구는 아침에 가볍게 다녀오기 좋은 곳이라 했고, 누구는 오르다 죽을 길이라 했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광장으로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먹던 우리는 급작스레 예수상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결심했다. 적어도 두세 시간으로 예상했던 자전거 투어가 한 시간을 겨우 조금 넘기고 끝이 나 방황하던 참이었다.
예수상까지 오르는 길은 예상보다 험했고, 길었다. 가벼운 산책로 정도일 거라 예상했던 건, 정말 근래 저지른 가장 큰 착각 중 하나였다. 혹시 우리가 지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급하게 결정된 여정에 충분한 물이 함께일 리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끔찍했다. 채 반도 남지 않은 물통을 바라보며 욕이 끓어 올랐다. 여차하면 올라오는 혹은 내려오는 사람에게 염치 불고하고 물 좀 얻을 수 있냐 물을 기세였다.
“올라갈 때 한번, 도착해서 한번, 내려올 때 한번 마실 수 있으니까 기억해.”
끝머리에 마주친 돌무더기는 정말이지 눈앞을 캄캄하게 했다. 저걸 오르며 떨어질 위험을 감수하느니 지금이라도 돌아 내려가는 것이 현명한 게 아닐까 싶었다. 돌무더기 절벽을 기어오르며 이 길 끝에 우리가 만나게 될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은 혹시 모를 실망과 허탈함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절로 주를 찾게 되는 길을 바들거리며 올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예상보다 힘든 길에, 부족한 물에, 아파오는 두 다리에, 떨어질 것 같은 해에 내심 이제라도 내려가는 게 맞는 건가 고민했지만, 결국엔 올랐고 해냈다. 멈추기도 참 많이 멈췄고, 쉬기도 참 많이 쉬었지만 돌아 내려가지 않은 것이 대견했다.
“대견해!”
“맞아 대견해! 우리 너무 대견해!”
몸이 휘청일 정도로 불어대는 바람과 눈앞의 예수상, 그리고 한참 위에서 떨어져 봤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비야 데 레이바의 건물들. 어쩌면 뒤 돌 때마다 멀어지는, 그래서 한층 더 아름다워지는 이 붉은 풍경에 오르기를 멈출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긴장으로 뭉쳐진 종아리의 아픔이 느껴졌고, 몰아치는 바람에 식어가는 땀이 오소소 한기를 만들기도 했다. 도착하면 마시려고 남겨둔 물을 한 모금씩 들이켜고 비로소 갈증에서 해방된 후에야,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그 여운을 즐길 수 있었다.
더러워진 양말과 신발, 소파 위로 쓰러지듯 몸을 누인 우리를 의문스레 바라보는 호스텔 주인아저씨에게 자전거도 타고, 산도 오르고, 예수상도 봤다며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덩달아 신이 나 맞장구쳐 주었다.
“무이 깐싸다 이 암브레!(너무 피곤하고 배고파요!)”
산 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배고픔이 몰려왔다. 해가 떨어지고 조금은 쌀쌀해진 기온에 겉옷을 챙겨 입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서로가 너무나도 대견했던 우리는 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근사한 저녁으로 이어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