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와 함께 제주도로 떠나는 날, 조카가 내게 물었다.
"이모는 가족이 몇 명이예요?"
"돌아가신 분도 포함해?"
"이모 마음이죠."
조카가 던지는 질문은 가끔 나를 깊은 생각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또박또박 '이모 마음이죠.'라고 말하는 조카의 목소리가 내게 가족에 대한 '선택권'을 주는 것 같았다. 단순히 조카를 이기고 싶다는 마음에 평소 좋아하지 않는 친척들까지 세면서 삼십 명이라고 말했다. 치기 어린 행동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조카와 같은 여섯 살이라면 당연지사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하며 합리화를 했다.
엄마, 우리 자매, 조카. 이렇게 삼대가 함께 떠나는 제주도 여행이었다. 3년에 한 번은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 된 게 벌써 세 번째다. 이번 여행은 지난 여행보다 특별히 길었고, 조카의 질문으로 '가족'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에 내내 맴돌았다. 내가 물어본 '돌아가신 분'은 우리 아빠였다. 그리고 나는 이번 여행에서 아빠와 엄마, 그러니까 나의 원가족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이번 여행이 긴 탓인지, 여행 내내 나는 엄마한테 화를 많이 냈다. 크게 싸운 건 아니었지만, 말투는 늘 퉁명스럽고 무뚝뚝했다. 답답한 기색도 숨기지 못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잘한 것보다 못한 것들이 더 많이 떠올라서 후회를 많이 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돌아가시면 엄마한테 해드리지 못한 것들만 생각나면서 후회하는 순간이 많겠지'라고 생각해서 엄마한테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다정한 딸이 아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나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기대하고 있는 '부모의 역할'은 기댈 수 있는,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의논하고 함께 결정하고 싶어 하는 다정한 엄마를 감당하기엔 나는 너무 '혼자'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결정하고, 판단하고, 홀로 행동하는 것을 훈련해 왔던 것이었다. 게다가 남편과의 의사결정에서도 '다정함'은 빠져있었고, '효율성'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엄마의 의사소통방식이 껄끄러웠던 나는 내 방식대로 행동했다.
"엄마.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그냥 엄마가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해."
벌써 이십 년 전쯤인가. 엄마와 시내에 나갔다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너는 말할 때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처럼 차갑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달라진 게 없었다. 어쩌면 나는 엄마를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여행 중의 나는 돌아가신 아빠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바다에 들어가서 노는 것보다 파라솔 밑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숙소 수영장에서 노는 것보다 침대에 누워서 햇살을 즐기며 잠자는 것을 즐겼다. 함께 있는 것도 좋아했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말하기보단 듣는 게 편했다. 그러면서 사색에 잠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아빠와 닮았구나'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엄마랑 가깝기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정하다. 항상 사람을 배려하고, 나보다 남을 더 먼저 챙기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부담스럽다. 본인이 필요한 게 있으면 본인이 챙기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챙기지 않는다. 그래서 챙겨주기보단 먼저 질문을 하는 편인데, 엄마는 그 반대라 챙겨주는 행동이 먼저 나타난다. 그러면 나는 또 직언이랍시고 엄마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엄마.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배려는 배려가 아니야."
엄마는 여행 중에 몇 번의 치밀어 오름을 삼켰을까. 그 이십 년 전에 엄마가 나와 싸우면서 '너는 꼭 너 같은 딸 낳아보라'라고 했는데, 나는 '싫은데, 나는 나 같은 딸 안 낳을 건데'라고 말하고 그 말도 지켰다. 그래서 나는 이모가 되었다. 엄마는 나를 보며 속만 끓이고 있을 것 같다. 못해준 것이 많고, 아픈 것이 많은 딸을 보며 미안한 마음에 참았다가도 가끔은 다 뒤집어엎고 쥐어박고 싶어 버릴 것 같다. 엄마라서 참고 있는 거겠지. 엄마가 그렇게 참고 살아온 세월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지난날의 그림자에서 엄마가 벗어났으면 좋겠다. 나한테도 들이받고, 소리 질렀으면 좋겠다.
"딸년이라는 게,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그러면 나는 자신 있게 조카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모의 가족은 아빠, 엄마, 동생, 제부, 조카, 남편까지 여섯 명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