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야기, 아홉번째날
이제는 남편에게 다이어트한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을 숨기는 게 더 어렵다. 아닌가, 다이어트가 더 어려운가. 혼란스럽다. 오늘은 재택근무를 해서 보통 때보다 혈당 측정 횟수가 더 많다.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은 오전 공복혈당과 퇴근 후 혈당만 측정 가능한데, 휴일이나 재택근무일 경우에는 식후 혈당까지 같이 측정할 수 있어서 혈당측정지 줄어드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공복혈당장애로 2형 당뇨병 진단을 받아 당뇨소모품을 싸게 살 수 있는 게 나은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원인불명의 통증 때문에 피검사를 할 때마다 공복혈당장애로 약을 먹어야 하는 수치다,라고 했는데 '좀 더 신경 써볼게요'하고 도망쳤다. 약을 처방받는다는 것은 '진단'을 받는 것인데, 낙인이 찍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게 뭐라고, 싶은데 그때는 진단명을 하나라도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빠가 '당뇨'였다. 할머니, 큰 아빠, 작은 아빠 할 것 없이 모두 당뇨를 달고 살았다. 어쩌면 친가 쪽의 식사습관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까지 공복혈당장애(당뇨 전단계)를 갖고 있으니 가족력인가 싶을 정도다. 친가를 떠올리면 할머니네 집 거실에 낮아서 만두를 빚는 아빠가 떠오른다. 아빠는 만두를 참 잘 빚었다. 직접 소를 만들고, 개껌모양으로 생긴 작은 스테인리스 도구로 왼손에 얹어진 피를 살살 돌려가며 소를 채워 넣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만두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아빠는 당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면을 좋아헀다. 항상 술을 마시는 아빠에게 라면은 얼마나 좋은 해장요리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술을 못한다. 소주 한 잔이면 얼굴이 붉어지고, 세 잔이면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된다. 그리고 한 병 가까이 마시면 토마토 노래를 부른다.
"나는 케첩 될 거야, 나는 주스 될 거야, 멋쟁이 토마토! 토마토!"
그래서 회식자리에 가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안 마시다 보니 권하지도 않는다. 애초부터 술을 안 마신 것은 아닌데, 공황장애 약을 처방받으면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이야기에 술을 끊었다. 그리고 약을 먹다 보니 카페인 섭취를 할 경우 잠을 더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카페인을 많이 흡수하게 되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생각이 더 많아져서 불면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노알코올, 디카페인 음료를 찾아서 마신다.
그런 내가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한 게 탄수화물이다. 빵을 엄청 좋아했는데, 우유와 계란을 못 먹게 되면서 이상하게 쌀에 집착하게 됐다. 밀 대신 쌀인 것 같았다. 오래전에 미사 시간에 신부님이 '중독은 끊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내 생각에 '중독은 끊는 것이 아니라 옮겨가는 것' 같다. 대상이 바뀔 뿐일지도 모른다.
내가 식후에 혈당 측정을 하지 않고,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왜 저녁 식사 후 혈당이 미친 듯이 올랐는지 모를 것이다. 초밥은 건강한 음식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샤리(초밥에서 초절임 한 밥을 일컫는 말)의 양을 전혀 줄이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던 걸로 보인다. 밥 한 공기 이상을 거뜬히 먹었으니, 아무리 좋은 반찬(회)을 곁들였다고 한들 탄수화물 섭취가 너무 많았다. 변명 같긴 한데 먹을 때는 인지하지 못했다. (혀가 길어지고 있다.)
그래서 기록하는 이 시간이 참 소중하다. 아빠는 내가 첫 회사에 들어갔을 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비록 나는 실천하지 못했지만, 새로이 사회생활을 하는 분들이 본다면 도움이 될지 모르니 남겨본다.
"매일 업무 하면서 배운 내용을 기록해 봐라. 나중에 그게 도움이 될 거다."
국민연금 납부 10년 차, 이제야 아빠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 당시에는 인수인계받는 것도 모자라 언니들 텃세에 집에 오면 곯아떨어지기 바쁜데 무슨 기록이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지는 대로 살게 되면 생각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생각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몸의 나이는 들어감에도 마음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때 업무를 하며 느끼고, 생각하고, 겪은 것들을 기록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봤다면 지금은 더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 이것도 꼰대 같은 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