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야기, 여덟번째날
마침 쉬는 날이라 생각날 때마다 혈당을 체크하면서 추이를 봤는데, 너무 적게 자도 혈당이 오르고 너무 많이 자도(공복이 오랜 시간 지속되어도) 혈당이 오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측정한 혈당수치가 나쁘지 않길래 조금만 있다가 저녁을 먹어야지,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혈당이 올라가 있었다. 내 몸은 내가 당이 떨어져서 죽을까 봐, 너무 걱정되나 보다.
휴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워만 있어야 했는데, 그게 가능하다면 내가 아닐 거다. 누워서 전자책을 한 권 완독 하고, 뭐 하지 뒹굴거리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인슐린 저항성'에 관련된 논문을 찾아봤다. 의학 관련 정보는 보통 전문 서적이나 병원에서 게시한 글 또는 논문의 서론에 기재되어 있는 이론을 많이 보는 편인데, 가급적이면 광고에 현혹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수백만 원을 몇 차례 날려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도 처음부터 나의 다이어트를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결혼 전에는 다이어트를 위하 한약을 처방받아먹을 때 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약이 효과가 그렇게 좋다길래 추천을 받아서 했는데, 일시적으로 효과가 좋은 만큼 요요가 굉장했다. 이건 평생 한약을 먹고살아야 할 정도인데? 싶었는데, 나중에는 내 식욕이 한약을 꺾어 누르는 정도가 됐다. 그러다 보니 강한 약을 처방받고, 약 복용 중의 손떨림, 심장 두근거림, 두통 등이 심해졌다. 그러고도 '즉각적인 효과'에 미련을 못 버려 또다시 '습담증'을 치료해야 다이어트가 된대, 라면서 한약을 처방받았다. 나는 그 돈으로 보약을 한채 지어먹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남편은 '더 이상 (약이든, 한약이든) 먹어서 하는 다이어트는 하지 마'라고 말했다. 차라리 운동을 하라고 했다. '먹어서 살이 빠지면 다행인데, 이건 뭐...'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렸지만, 말줄임표에 숨어져 있는 의미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반박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할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었다.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반드시 복수할 거야,라는 작은 불꽃이 그때부터 내 안에 생겨났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저런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그때의 내가, 그 작은 도발에만 넘어가지 않았어도 나는 좀 더 오랜 시간 싱글라이프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가끔 후회가 된다. 결혼을 한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고, 어차피 아이도 낳지 않고 살 거라면 42살에 결혼할걸 그랬다,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남편과 나는 직장동료였다. 직업 특성상 회식이 정말 드물었는데, 문제는 그 회식에서 생겼다. 남편이 옆 동료들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나를 보고 '에이~ 쟤는 뚱뚱해서 안돼'라고 말했다. 그때의 나는 52kg이었다. 물론 그때의 나는 나 자신이 말랐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나는 '날씬했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뭐? 뚱뚱? 뚱~뚜웅? 갑자기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그 동료들이 미혼의 우리를 보고, '쟤는 어때, 얘는 는 어때' 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서 무마하기 위해 던진 말일 수도 있는데 당시 전후사정을 모른 채 '뚱뚱해서 안돼'라는 말만 들은 나는 불타올랐다.
"반드시 쟤를 꼬셔서 사귄 다음에 뻥 차버리겠어."
곧바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나는 남편과 사귀게 되었는데 어쩌다 연애 100일 만에 날짜 잡고,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 남자가 알고 보니 숨은 재벌이었다거나, 모델 키에 연예인 얼굴이었다거나,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남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재수 없는 게 매력이다.
그래도 숨은 재주는 하나 있었는데, 한식을 잘한다는 것. 아무래도 부모님의 음식솜씨를 어깨너머 보고 자라서 그런지 내가 힘들어 보이면 갈비찜도 해주고, 부대찌개며 순두부찌개며 뚝딱뚝딱 끓여놓는다. 한글날에도 출근하는 남편은 자는 날 두고, 본인이 설거지하고 밥을 차려먹더니 '밥이랑 순두부찌개 해놨으니까 먹고, 남은 밥은 얼려줘요'라고 말하고 나갔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내가 먹을 갈치구이 한토막을 정성껏 구웠다.
갈치를 구우면서 쓸데없는 상상력이 발휘되었는데, 사람들이 내 글을 보고 '너 남편 없는데 혼자 남편 있는 척 비밀 얘기한다고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구절절 변명하는 상상을 하다가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남편이랑 신행 때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을 입고 다시 사진을 찍어서 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에는 닭볶음탕을 시켜 먹었다. 포두부와 푸주를 추가해서 먹었고, 부족한 야채를 보충하기 위해 상추를 싸서 먹었다. 밥을 먹지 않았으니 괜찮을까? 싶다가 불현듯 고추장이 탄수화물이니 혈당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트레이너들이 탄수화물(고추장)로 양념한 데다 넣은 탄수화물(떡)을 튀김(탄수화물과 지방의 결정체)과 먹는다고 떡볶이를 '다이어트 금지식품'으로 지정한 것이 아닌가.
다이어트한다고 해놓고 자꾸 '저 이렇게 잘 먹고살아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긴 한데, 정말로 '잘' 먹는 건 어렵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고, 알아야 할 것이 많다. 왜냐면 이 글을 쓰기 직전에 '삼겹살'은 당뇨 환자가 가 피해야 하는 음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서 최근 일주일 내에 나는 삼겹살을 두 번 이상 먹은 기억이 스쳐갔다. 목살로 대체하면 된다. 나는 이미 유제품과 계란을 포기했기에, 고기를 포기하는 것은 선택지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