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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Sep 11.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10

서장대를 둘러싼 성은 과연 협축일까?-2

팔달산 정상을 둘러싼 성은 왜 안팎을 돌로 쌓았을까? 왜 성에 많은 큰 구멍을 내었을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파헤쳐본다.


서장대를 둘러싼 성은 과연 협축일까?


팔달산 정상에 대해 의궤에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라고 전략적 입지를 매우 좋게 평가하고 있다. 이런 평가로 팔달산정에는 최고 지휘부인 서장대(西將臺)와 이를 보좌하는 서노대(西弩臺)와 후당(後堂)을 세웠다.


입지나 시설물보다 필자의 눈에 띈 것은 서장대를 둘러싼 성이다. 성 바깥쪽이나 안쪽이나 모두 돌로 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혹시 화성에서 유일한 협축이 아닐까? 지난번 1편에서 따져본 결과 "협축형식으로 쌓은 내탁"으로 결론을 냈다.


이곳에 왜 이런 형식의 성을 쌓았을까?

서암문에서 팔달산 정상이 끝나는 곳까지 협축형식의 성을 쌓은 후 일부만 노출시키고 나머지는 흙으로 메웠다.

이유를 살피기 전 성의 현황을 보면 길이는 44보(약 52미터), 높이는 3.5미터, 성을 잘라본 단면은 아래 폭이 4.2미터, 위쪽 폭이 3.5미터, 성 안쪽에는 지상으로 1미터에서 1.4미터 사이로 노출되고 그 아래 부분은 2.1미터에서 2.5미터 정도 흙으로 메워진 상태다.


성 밖에서 보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낭떠러지의 경계를 따라 성을 쌓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더 이상 서쪽으로 나아갈 수 없는 위치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다면 성의 높이가 지금의 2배는 넘을 것이다. 절묘한 노선 선택이다.

팔달산 정상부 성 밖에서 보면 사진과 같이 급경사 지형인데 낭떠러지 경계선에 절묘하게 성을 쌓았다

공사 일정을 보면 서성(西成)의 착수는 공사 첫해인 갑인년 8월 20일이고, 서장대 공사는 기공식(開基)이 8월 11일, 기둥 기초와 기둥 세우기(定礎立柱)가 9월 10일, 상량(上樑)이 15일, 완공(成)이 29일이다. 서장대 공사는 착수부터 기초까지 31일, 완공까지 50일이 소요됐다.


일정 중 특기할 것은 서노대(西弩臺)는 다음 해에 공사를 한 점, 그리고 7월 12일(姑停)부터 8월 1일(更始)까지 20일간 화성 공사 전체를 중단한 것이다. 중단을 하면서 내건 조건이 "서늘해질 때까지"라고 한 것을 보면, 중단 이유는 너무 더운 날씨 때문이다. 

서장대 공사는 화성 성역 첫해 8, 9월에 이뤄졌다. 완전한 우기(雨期)이다.

이제는 이곳에 이런 특별한 형태의 성을 쌓은 이유부터 살펴보자.

첫째,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낭떠러지 끝을 따라 성을 쌓고 성 안에 흙을 운반하고, 쏟아붓고, 다지는 작업을 연속적으로 해야 하는데 성벽이 쓰러질 우려가 있다. 시공과 구조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전편에 이미 말씀드렸다.


둘째, 공사기간인 8월과 9월은 장마철로 비가 올 경우 토사 운반은 불가능하고, 흙이 유실되고, 흙은 죽탕이 된다. 흙으로 메우는 것보다 돌로 쌓는 것이 인력, 경비, 공사기간의 낭비를 막는 방법이다. 흙으로는 우기에 공사를 못해도 돌은 비가 오는 날에도 공사가 가능하다.


셋째, 공사장소인 팔달산 정상부는 주면이 암반으로 형성되어 흙을 구하기 힘들고, 산 꼭대기라 운반도 힘들다. 내탁에 필요한 막대한 량의 흙을 조달하거나 운반하는 데 소요되는 인력과 경비와 시간에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서장대 바닥은 암반으로 이뤄졌다. 아직도 원래의 암반을 볼 수 있다. 장대석 밑에 누렇고 다듬지 않은 돌이 원래 암반이다.

하지만 돌은 팔달산 정상부의 암반에서 벌석하여 쓸 수 있으므로 재료의 획득이나 운반이 흙보다 훨씬 유리하다. 이에 소요되는 인력, 장비, 공사기간을 절약할 수 있다.


넷째, 흙으로 내탁을 할 경우 성 안쪽에 흙을 붙이고 널리 펼쳐야 하므로 가뜩이나 좁은 터를 잠식하게 된다. 돌로 협축형식으로 쌓고 이를 내탁으로 이용한다면 유용한 터를 100% 활용이 가능하다.

돌로 성을 쌓은 후 이를 내탁으로 활용하였다. 흙으로 내탁을 하였다면 많은 터를 내탁에 빼앗겼을 것이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서장대를 둘러싼 성에 구멍을 설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성에 구멍을 내려면 흙에서는 불가능하고 돌로 안팎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체성에 구멍을 내야만 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글이 필요 없다. 우리 모두 서장대에 올라 시가지 쪽만 조망하지 말고 성에 올라 보자. 성에 올라 여장에 있는 원총안 구멍으로 성 밖을 내다보고 다시 근총안을 통해 성 밖을 보자. 성 밖 어느 지점이 보일까?

맨 위 여장의 구멍으로 성 밖을 내다보면 성 아래는 아예 보이지 않는 다. 감시에 사각지대가 생긴 것이다.

필자가 직접 보니 성 아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먼 곳만 보인다. 즉 급경사지라서 성 아래와 중간거리까지 감시 사각지대가 생긴 것이다. 한마디로 "여장의 효용이 상실"된 것이다. 이러한 감시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체성에 구멍을 내어 성 아래를 감시할 현안(懸眼)을 설치해야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장의 원총안과 근총안은 먼 거리에 대한 원근총안(遠近銃眼)의 역할을 하고, 아래의 체성에 설치한 위아래 구멍은 감시 사각지대인 성 아래 근거리에 대한 원근총안(遠近銃眼)이다.


화성에서 체성에 현안이 있는 특별한 경우가 된다. 협축형식을 빌려 안쪽에도 돌로 성을 쌓아 구멍을 내고, 필요한 부분만 노출시키고 나머지는 흙으로 묻은 것이다.

여장의 원근총안(遠近銃眼)은 먼 곳에 대응하고, 감시 사각지대에는 체성에 뚫은 원근총안으로 대체하였다. 체성에 구멍을 내기 위해 돌로 성 안팎을 쌓은 것이다. 

이 구멍에서 눈에 띄는 아이디어는 아래 구멍이 위 구멍보다 크고 형상도 가로로 긴 것이다. 여기에는 정조의 부하 사랑과 과학이 스며있다. 아래 구멍은 땅에 붙어 있어 이를 사용하는 병사는 몸을 가로로 누이며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불편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주려 가로로 길게 했다. 물론 가로로 길수록 볼 수 있는 범위도 몇 배가 넓어진다. 실로 묘안이다.

아래 구멍은 크기와 형상이 특이하다. 병사가 관찰하는데 불편을 덜어주기 위함도 있고, 감시 범위를 넓히기 위한 목적도 있다.

깊은 지략이 담겨있는 팔달산 정상부의 성을 잘 보존해야 한다. 이 구간은 옛 모습이 많이 보존된 구간이다. 아직도 땅 속에 묻혀있는 위 구명 2개와 아래 구멍 1개를 노출시키고, 구멍 속도 청소하길 바란다.


성 위에 올라 여장의 원총안과 근총안으로 성 밖 적군을 내다보고, 아래로 내려와 체성에 뚫린 구멍으로 성 밖 바로 아래를 보는 체험의 화성을 만들어야 한다.


정조의 훌륭함은 성을 쌓기 전 이런 문제점을 예측했다는 것이다. 만일 예측을 못했다면 산꼭대기에서 성을 모두 쌓고, 공사를 중단하고, 모두 부수고, 다시 쌓아야 했을 것이다.


 

서장대를 감싼 성은 지형으로인해 생긴 감시 사각지대를 감시할 수 있도록 협축형식의 성을 쌓은 지략이 숨겨진 특별한 성이다.

자재 조달, 안전, 인력과 경비 절감, 공사기간 단축뿐만 아니라 지형 때문에 생긴 감시 사각지대를 없애려 고안한 세계 유일의 "협축형 내탁 시스템"인 아주 특별한 팔달산정(八達山頂)의 성에서 정조(正祖)의 전략과 건설경영, 그리고 설계의도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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