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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Sep 15.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13

성 쌓기에 필요한 흙을 위해 남지(南池)를 팠을까?

수원시가 화성의 남지와 북지를 복원 중에 있다. 성 안에 못을 왜 만들었을까? 성 쌓기에 필요한 흙을 조달하기 위해 못을 팠다는 설이 맞을까?


흙을 조달하기 위해 지(池)를 팠을까?


수원시가 화성에서 매우 중요한 시설물을 복원 중에 있다. 남지(南池)와 북지(北池)다. 남지는 상남지와 하남지 2개로, 팔달문 안 남창(南倉)의 남쪽에 있고, 북지는 북동포루(砲樓)와 북포루(舖樓) 사이에 있다. 수원시민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다.


화성에 지(池)는 연못으로 남지 2곳, 북지, 동지 2곳으로 모두 5개의 못이 있다. 남지(南池)는 성 안의 물을 빼는데 관련된 시설이고, 북지(北池)는 남지와 반대로 성 밖의 물을 끌어들여 모아두는 역할을 했다. 동지(東池)도 남지와 유사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팔달산 입구 관광안내소 옆에 남지(南池) 터가 있다. 기존 건물을 부순 상태로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지(池)를 복원한다고 하니 바로 알려야 할 것이 있다. 일부 학자들이 "성역 초기(初期)에 지(池)를 판 것은 치수대책과 동시에 성(城)을 쌓는데 필요한 흙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주장이 정설로 가까이 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먼저, 의궤 "일시(日時)" 기록에서 성역 초기 일정을 분석하면 크게 3단계로 볼 수 있다. 1단계가 돌 뜨기(浮石始役), 현장조사(城址看心), 측량(立標定基)으로 공사 준비단계이다. 다음 2단계로 북수문, 남수문, 개울치기(濬川), 상남지, 북지, 하동지 공사로 모두 물과 관련 있는 공사다. 다음 3단계로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의 착수다.


초기 일정을 보면 치수(治水) 대책을 화성 건설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착시(錯視) 현상이다. 사실은 특정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치수일 뿐이다. 특정 목적이란 바로 3단계 공사인 북성과 남성의 착수인 것이다.    

성역 초기의 북수문, 남수문, 개울 치기, 상남지, 북지, 하동지 공사는 대부분 치수대책으로 보이지만 치수를 위한 치수대책이 아니다.

2단계 공사를 끝내지 않으면 3단계인 성을 쌓는 공사가 불가능했다. 남지 인근 남성 터는 개울이 성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북지 인근 북성 밖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저지대여서 물을 잡아두지 않으면 착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 상남지와 북지를 가장 먼저 끝내야 했다.


상남지를 끝낸 날이 4월 1일이고 남성(南城)을 착수한 날이 4월 16일이다. 북지를 끝낸 날이 4월 4일이고 북성(北城)을 착수한 날이 4월 7일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다, 필수조건이며, 정조의 당초 계획이었다. 모두 상남지와 북지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린 것이다. 치수를 위한 치수공사가 아니라, 북성과 남성을 착수하기 위한 선행 공사인 것이다.  

북지(北池) 공사를 끝내고 3일 후 북성(北城)을 착수한 것이 우연일까? 북성은 북지가 공사를 마치고, 북성 밖 저지대 물을 끌어 모은 3일 후에야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역 초기에 지(池)를 판 것이 성을 쌓는데 필요한 흙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직접적인 근거도 제시해 본다.


첫째, 초기에 흙이 필요하지 않았다. 의궤 "토품(土品)"에 남성과 북성은 "토질이 개흙과 같아서 땅을 6척을 파고 벽돌을 3중으로 깔았다"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초기에는 토질을 바꾸는 치환공사(置換工事)와 기반을 보강하는 공사라서 흙이 필요하지 않고 모래, 자갈, 벽돌, 큰 성돌(大城石)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둘째, 공급에 맞는 일정이 아니다. 5개 지(池) 전체에서 나올 흙 량의 3분의 2는 하남지와 상동지에서 나온다. 흙이 필요했다면 많은 양의 흙이 나오는 하남지와 상동지를 먼저 파는 것이 당연할 텐데 이 2곳은 모든 성역이 끝나는 시점에 착수했다.


셋째, 흙량이 너무 적다. 북성의 내탁에 필요한 흙은 54,000 입방미터로 계산된다. 반면에 북지에서 나온 흙은 1,800 입방미터이다. 북성에 필요한 량의 3% 정도이다. 매우 미미한 량이다.

북성 성 안쪽에 붙이는 흙을 조달하기 위해 지(池)를 초기에 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종합하면 소요되는 자재의 종류, 시기, 수량이 모두 맞지 않는다. 지(池)를 파고 나온 흙을 북성과 남성에 사용했다는 연관성이 없다. 오히려 개울치기 준천(濬川)으로 확보된 모래, 자갈, 돌은 매우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종류와 시기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조는 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성(城) 쌓기 공사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에 치수를 시행한 것이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지(池) 공사는 크리티컬 패스(Critical Path)인 셈이다. "크리티컬 패스"란 어느 한 공정(패스)이 지연되면 전체 공사가 그만큼 지연되는 여유가 없는 주공정(主工程)을 의미한다. 

발아래 대천(大川)에서 긁어모은 자갈이 화성을 쌓는데 큰 공헌을 헸는데도,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 가족이 즐겁게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정조는 지(池) 공사에 또 다른 큰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막대한 공사용수의 확보다. 지(池)에 모여진 물을 용수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지(池)를 판 것이다. 그것도 지역에 맞춰 상남지, 북지, 하동지 3곳을, 소요량에 맞춰 필요한 크기로, 사용 시기에 맞춰 성역 초기에, 판 것이다.


지역, 크기, 시기를 정확히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다. 상남지는 남성과 서성 일부를, 북지는 북성과 서성 일부를, 하동지는 동성에 필요한 용수를 담당했다. 요즘도 본 공사 착수 전 가설전기, 가설 수도, 가설도로를 제일 먼저 개설한다.

 

상남지, 북지, 하동지, 개울 치기 공사에서 정조의 비상한 혜안과 의도를 엿보았다. 오늘따라 정조의 큰 모습이 더 그립다.

작고 예쁜 지(池)가 화성성역 전체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3개 지(池)가 없었다면 화성은 없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도랑치고 가재 잡는다"는 말은 화성의 지(池)와 준천(濬川)을 위해 태어난 말이다.


이런 숨은 큰 의미를 지닌 남지와 북지가 의궤에 충실하게 잘 복원되길 기원한다. 크리티컬 패스(主工程)를 정확히 파악한 상남지(上南池)와 북지(北池), 하동지(下東池), 개울 치기(濬川)에서 정조(正祖)의 비상한 혜안(慧眼)과 의도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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