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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Jan 05.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32

가장 어려운 공사는 어디였을까?

화성 성역에서 보이지 않는 공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곳은 어디였을까?


가장 어려운 공사는 어디였을까?


화성 성역은 공사가 아니라 대규모 건설사업이다. 구상에서 시작하여 개념 확정, 기본계획, 설계, 시공, 감리, 시운전, 유지관리 등 단계마다 문제들을 헤쳐 나가야 한다. 모두 어려움이 있겠지만, 공사단계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 살펴보도록 한다.


가장 어려운 공사는 어디였을까?


시설물을 보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어려운 공사, 쉬운 공사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대체로 규모로 판단하기 때문에 틀리지 않는다. 규모로 보자면 장안문, 팔달문이, 정교함으로 보면 방화수류정, 동북공심돈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규모가 커도 손쉬운 공사가 있고, 작아도 까다로운 공사가 있다. 공사란 원래 보이지 않는 부분에 어려움이 많이 도사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어려웠을 공사는 어디였을까 찾아보도록 하자.

지상 구조물로는 규모가 제일 큰 장안문이 어려운 공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규모가 크다고 모두 난공사는 아니다.

성역이 아주 오래전이었고, 보이지 않는 지하의 상태를 어찌 판단할 수 있을까?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기록에서 캐내어 보자.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다니 참으로 놀랍다. 권수(卷首) 도설(圖說) 중 "토품(土品)"에 대한 부분이다.


토품은 "성 터"와 "시설물 터"로 나눈 후, "지형"과 "토질"의 상태로 공사를 설명한 기록이다. "지형(地形)"에서는 꺼지거나 솟아오른 외형을 메우고 잘라내는 작업에 대해 언급하였다. "토질(土質)"에서는 연약지반, 지하수 등 땅속의 상태에 대한 작업을 기록하였다.

남수문과 북수문은 모두 큰 내(大川) 속에서 기초 공사를 해야 했던 난공사였다. 

언급된 여러 지역 중 "지형"과 "토질"로 나누어 가장 어려웠던 곳을 각각 1 곳씩 선정해 본다.


먼저, 지형으로 인해 가장 어려운 공사를 한 지역은 어디일까?

서장대(西將臺)가 세워진 팔달산 정상이다. 당시 서장대 터는 의궤에 "돌자갈밭(石确被土)인 데다 그 지세가 동북으로 비탈이 졌으면서도 웅장하고 높은데(傾歪崱屴), 대 아래는 한쪽으로 치우치고 좁다(臺下偏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당시 팔달산 정상은 암반으로 들쑥날쑥했고 주변은 급경사지였다. 이런 지형에 서노대, 서장대, 후당을 세우고 행사에 쓸 평평하고 너른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따라서 규모도 크고 매우 위험한 보축(補築) 공사를 해야만 했다. 급경사지에 돌을 쌓고 흙을 보태며(積石累土), 모래주머니를 말뚝으로 고정시켜서(揷木被沙), 산마루와 가지런하게(圍與頂齊) 올려 쌓는 방법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지형 때문에 보축공사를 대대적으로 한 곳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와 서노대 터다. 그 공사를 한 규모가 2,000평에 달한다. 

공사규모는 높이가 거의 3장(丈)이고, 넓이는 사방 70보(步)이다. 3장은 약 10m 높이이고, 사방 70보는 면적으로 2,000평에 달한다. 비탈진 산꼭대기를 감안하면 큰 규모이다.


위치도 팔달산 정상이라 필요한 자재를 산 중턱이나 하천에서 채취하여 정상으로 옮겨와야 했다. 정상 인근은 모두 돌로 된 지형이라 보축에 필요한 흙과 모래는 구할 수 없었다.


팔달산 정상 서장대 터는 산꼭대기라서 필요한 자재의 운반, 깎아지른 지형의 위험성, 장마철 공사로 인한 토사 유실 등에 대비하여 여러 조치를 한 곳이다. 서장대 터를 지형으로 인한 최대의 난공사 지역으로 선정했다.

팔달문은 평지이지만 5척을 파자 지하수가 용출하여 4일을 물을 퍼내고 9척을 더 파는 어려운 공시를 한 곳이다.

다음으로, 토질로 인해 가장 어려운 공사를 한 곳은 어디일까?

공동 1위로 남문, 남수문, 북수문 터다. 우열을 가르기 힘들 정도로 모두 물과 싸우며 공사를 한 곳이다. 굳이 순위를 매긴다면 규모가 넓은 남수문과 북수문이 공동 1위, 남문이 2위로 보면 된다,  


북수문과 남수문은 물이 흐르는 큰 내(大川) 안에서 공사를 하였다. 공사규모는 동서로 38보 남북으로 51보를 파내어 다듬고, 깊이 14척을 파고, 모래에 진흙을 섞어 다진(沙水杵築) 후 벽돌을 이중(鋪礡二重)으로 까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리의 안팎 넓은 범위까지 고기비늘모양으로 박석(廣鋪魚鱗礡石)을 깔고, 그 끝에 긴 돌을 물리어(竪植長石) 굳혔다. 비늘모양으로 박석을 깔거나 그 끝에 장석을 물린 것은 흐르는 물에 기초가 패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함이다. 

북수문은 물속에서 공사를 하였을뿐더러 기초가 패지 않도록 안팎으로 넓게 박석을 까는 어려운 공사를 하였다. 

그런데 남문은 평지인데  왜 물속에서 공사를 하였다고 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남문인 팔달문은 북문처럼 땅을 5척쯤 파내려 갔는데 지하수가 엄청 솟아나기 시작했다. 지하수맥 자리인 것이다. 공사를 위해 물을 모두 퍼내고, 땅을 더 파내어야만 했다. 


의궤에 "여럿이 두레박으로 번갈아 퍼내었더니 나흘 만에야 겨우 잦아서(四日乃止), 다시 9척을 파내려(加堀九尺) 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땅을 판 깊이가 모두 합해서 14척이었다.


남문, 남수문, 북수문 터는 큰 하천 가운데와 지하수가 용출하는 곳으로, 물을 제어하고, 깊이 파고, 연약한 흙을 파내어 좋은 흙과 벽돌로 바꾸고, 흐르는 물에 기초가 패지 않도록 조치를 한 곳이다. 팔달문, 남수문, 화홍문을 토질로 인한 최대 난공사 지역으로 선정했다.   

용도(甬道) 구역과 서남암문에서 남포루까지 구간은 지반이 암반으로 가장 손 쉬었던 공사 구간이다.

이상으로 지형과 토질로 인해 까다로운 공사를 한 곳의 선정을 마쳤다. 조사하던 중 나타난 몇 가지 재미있는 자료를 추가해 본다.


가장 쉬운 공사를 한 곳은 용도(甬道) 구간과 서남암문에서 남포루까지의 산상서성 구간이다. 이 구간은 "흙을 겨우 2척 정도 긁어내면 바로 암반이 나와 땅을 팔 필요조차 없었고 캐어낸 돌은 그 자리에서 다듬어 사용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도 보았다"라고 가장 쉬운 지역임을 표현하고 있다.


난이도와 관계없이 가장 넓은 곳은 동장대에 부속된 훈련장(操場)이다. 크기가 동서 180보 남북 240보로 무려 18,000평에 이른다. 훈련장을 관리하는 동장대 터의 무려 20배 규모다. 배꼽이 배보다 큰 형국이다.


가장 적은 공사비가 투입된 곳은 포사(舖舍)이다. 2곳 합계가 350냥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가장 공사비가 많이 투입된 곳은 팔달문으로 58,000냥이 들었다. 내포사(內舖舍) 300채를 짓는 공사비가 든 셈이다. 또한 가장 공사기간이 길었던 시설물도 팔달문이다. 장안문은 공사기간과 공사비 모두에서 팔달문과 간발의 차이로 2위다.

행궁 안에 위치한 내포사(內舖舍)가 가장 공사비가 적게 든 시설물이다. 가장 돈이 많이 투입된 팔달문의 300분의 1 정도이다.

오늘은 화성에서 어려운 공사를 한 곳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정도 까다로움이면 화성 전체는 대체로 공사하기에 무난한 지형과 토질을 갖춘 곳으로 필자는 평가한다.


화성은 방어하기에도 공사하는데도 모두 합당한 성터로 평가할 수 있다. 까다로운 공사지역과 그 규모를 살펴보며 정조(正祖)의 탁월한 "터 잡기" 안목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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