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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Dec 29. 2020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31

자성치(自性雉)는 어디 있을까?

인공(人工)이 아니고 자연 지형 그대로 만들어진 치를 자성치(自性雉)라 이름 지었다. 화성에는 어디에 있을까?


자성치(自成雉)는 어디에 있을까? 


치(雉)의 기능에 대해 의궤는 "좌우로 마주치는 치(雉)에서 탄환과 화살이 번갈아 날아온다면 비루(飛樓)나 운제(雲梯)를 어찌 설치할 수 있겠는가"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치는 성에 접근하는 적을 좌우에 돌출된 치에서 적의 양 옆구리를 공격함으로 방어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성치(自成雉)란 무엇인가?


"자성치"란 말은 필자가 만든 용어이다. 의궤에 "대체로 성은 굽고 꺾인 데가 많아서 모퉁이와 마주치거나 문이 있는 곳에 이르면 스스로 치의 형상을 이루어 정성(正城)을 보호하게 마련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 중 "스스로 이루어진 치"에서 "자성치(自成雉)"라 만든 것이다.


요약하면 "자성치는 꺾이는 곳이나 문을 만나는 곳(우각우문, 遇角遇門)에서는 지형 자체가 치의 모양이 되므로 인공적으로 만들지 않아도 스스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치(雉)"로 정의할 수 있다. 

동남각루 우측은 성 밖으로 돌출된 치와 같은 지형인데 이웃하는 동3치와 함께 둘 사이의 성을 유기적으로 방어한다.

화성에 자성치가 어디 있을까?


화성을 답사하면서 자성치에 어울리는 곳을 찾아보았다. 자성치는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말하므로 인공적으로 만든 곡성은 제외하였다. 독자 여러분도 지나치실 때 유심히 살펴보시길 바란다. "좌, 우" 명칭의 기준은 성 밖에서 보는 좌우를 말한다.


첫째, 서북각루 좌우로, 좌측은 화서문 쪽 성을 방어하고, 우측은 서1치와 함께 그 사이의 성을 방어한다.

둘째, 서장대 뒤편 내탁부로, 좌측은 서2치와 함께 둘의 사이에 있는 성을, 우측은 서암문과 함께 그 사이에 있는 성을 방어한다.


셋째, 동남각루 우측으로, 동3치와 함께 둘 사이에 있는 성을 담당한다.

넷째, 동북공심돈 좌우로, 좌측은 동북노대와 함께 둘 사이의 성을, 우측은 동장대 쪽 중간까지의 성을 방어한다. 

팔달산 정상의 성은 서장대 뒤편이 성 밖으로 돌출된 형상이다. 또한 높이도 주변보다 높아 자성치의 효과가 같은 자성치에 비해 몇 배나 된다.

다섯째, 동북공심돈과 동장대 사이에 툭 튀어나온 반원형 너른 지형으로, 좌측은 동북공심돈까지의 성을, 우측은 동장대와 함께 둘 사이의 성을 방어한다.


여섯째, 동장대 내탁부로, 좌측은 동북공심돈 쪽 중간까지의 성을 맡고, 우측은 동암문과 함께 그 사이의 성을 방어한다.

일곱째, 동북각루 좌측으로 북암문과 함께 그 사이의 벽돌 성(甓城)을 방어한다.


이상으로 7곳을 위치 순서대로 나열해 보았다. 다만 자성치 인데도 제외한 곳이 있다. 창룡문 좌우측과 화서문 우측이다. 이 두 곳은 치(雉)의 역할보다 문과 옹성을 방어하는 공심돈이나 적대의 역할이 더 어울리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자성돈(自成墩)"이나 "자성대(自成臺)"가 더 적합할 것이다.   

성이 꺾이는 위치에 있는 서북각루의 돌출된 지형은 인접한 서1치와 함께 그 사이의 성을 방어한다.

여기에 나열한 7곳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검증이 필요하다. 검증방법은 원성(元城)으로부터의 돌출 길이를 기존 곡성의 돌출길이와 비교하는 방법이다. 


의궤 자료를 기준으로 곡성의 돌출 길이를 보면 적대 29척, 포루(砲樓) 29척, 동북노대 20척 5촌, 포루(舖樓) 평균 21척, 치(雉) 평균 20척으로 돌출 길이는 6.3m에서 9m까지이고, 평균은 7.5m이다.  


필자가 실측한 자성치의 돌출 길이를 보면, 동장대 10.6m, 서장대 15.3m, 동북공심돈 11.6m(좌), 3m(우), 서북각루 5.2m(좌), 16.5m(우), 동남각루 4m(우), 동북각루 5.9m(좌)의 수치를 보이고 있다. 돌출 길이가 3m에서 15m로 평균 9m이다.


수치를 비교해 보면 지형으로 이뤄진 자성치의 돌출 길이는 인공적으로 만든 곡성의 돌출 길이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만큼 방어와 공격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선정이 무리하지 않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평면으로 볼 때와 다르게 동장대의 내탁부로 성 밖으로 튀어나간 지형이 굉장히 크다. 자연 지형의 훌륭한 자성치이다.

일곱 곳을 살펴보면 공통되는 특징이 있다. 다름 아닌 모든 자성치에는 어김없이 시설물을 배치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다. 자성치로 충족되면 시설물을 배치하여야 한다는 시설물 배치기준 즉 설계기준인 것이다. 이유는 자성치의 너른 성탁 위는 시설물의 모양이나 규모를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사비나 공사기간을 거의 절반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치성 위에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은 성 높이와 같은 치성을 먼저 쌓아야 하므로 그만큼 공사기간과 공사비가 더 투입되는 것이다. 또한 치성은 성 밖으로 돌출되어야 하므로 돌출 길이와 너비 그리고 모양에 한계가 있다. 치의 한계는 그 위에 지을 시설물의 길이와 너비를 제한하게 된다.


이처럼 공사기간과 공사비의 절약, 그리고 원하는 시설물의 자유로운 설계는 자성치의 큰 강점이었다.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은 유일한 자성치는 동북공심돈과 동장대 사이에 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짧아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았다.

자성치는 이처럼 많은 장점이 있으나 정조(正祖)는 자성치를 그대로 쓸 리 만무한 분이다. 정조는 첫째, 장대(將臺)와 각루(角樓)는 모두 자성치에 배치하도록 하였고, 둘째, 자성치 내 시설물은 여장에서 간격을 두고 성 안쪽으로 당겨 배치하도록 하였다. 그 의도는 무엇일까?


성 안쪽으로 당겨 배치한 것은 시설물과 자성치 양쪽 모두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다. 즉 같은 땅에서 시설물과 자성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좁은 공간을 위아래로 사용해 2배의 병력과 화력을 운용한 벽등(甓磴)과 마찬가지로 자성치를 앞에 두고 그 뒤에 시설물을 지은 것은 앞뒤로 2배의 전력(戰力)을 운용하기 위한 의도이다. 벽등에서는 상하 확장을, 자성치에서는 평면 확장을 시도한 것이다.


장대와 각루만을 배치한 것도 물론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배치이다. 장대는 3성 장군의 최상급 군사 지휘소이고, 각루는 대령급이 머무는 장대 다음 급의 지휘소이다. 이에 걸맞은 병력의 배치는 당연하다. 각루와 장대의 막강한 병력과 화력으로 자성치를 엄호하고, 자성치의 병력은 각루와 장대를 지키는 상호 방위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이것이 성 안쪽으로 당겨 배치한 이유다.

창룡문 좌우측에 돌출된 지형은 치(雉)보다는 적대(敵臺)나 공심돈(孔心墩)의 역할을 한다.

자성치(自成雉)에 올라 좌우를 바라보면 정조의 지모(智謀)가 서려있다. 자연이 내어준 자성치(自成雉)를 200% 활용한 정조(正祖)의 지략(智略)과 공간 확장 능력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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