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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Feb 08.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37

정약용은 화성에 무얼 남겼을까?-2

다산초당에 동백꽃이 피었다. 정약용이 화성에 남긴 흔적은?

정약용은 화성에 무얼 남겼을까?

남도 여행 중 강진(康津) 다산 박물관을 방문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큰 도움이 되었다. 화성 이야기도 있었다. "정약용(丁若鏞)의 설계로 수원 화성이 지어졌고, 거중기를 발명하여 몇 만 냥 절약되었고, 공사기간도 10년에서 3년으로 단축시켰다"란 내용이다.


하시는 일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과장은 당연하지만, 화성과 관련해서는 허풍이 태풍 급이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3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산(茶山) 정약용이 화성 성역에 끼친 영향이나 기여는 실질적으로 매우 미미하다고 보는 편이다. 


과연 다산(茶山)은 화성에 무엇을 남겼을까?


다산은 화성 축성 기본계획인 "성설(城說)"과 "도설(圖說)"을 화성에 남겼다. 계획과 실제, 즉 기본 계획서인 "성설(城說)"과 공사 보고서인 "성역의궤(城役儀軌)"와의 차이점을 살펴 다산을 평가해 보려 한다. 아마 대학자 다산에 대한 최초의 평가일 것이다.

화성성역을 마친 후 돌 1 덩이, 못 1개까지도 빠짐없이 기록한 한국 최초의 공사 기록인 화성성역의궤를 편찬하였다.

먼저, 성설과 화성성역의궤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성설(城說)"은 정약용이 만든 화성 축성 기본계획이다. 계속해 옹성, 포루, 현안, 누조, 기중에 관한 도설(圖說)을 작성한다. 이 중 성설만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이란 이름으로 발표된다. 어제(御製)란 말이 붙어있듯 임금이 직접 만든 것으로 발표되고 이는 화성 성역의 지침이 된다.


"화성성역 의궤(華城城役儀軌)"는 공사가 끝난 후 성역과 관련된 것을 낱낱이 기록한 공사 보고서이다. 공사에 관한 최초의 의궤다. 내용은 사업 개요, 시일(時日, 일정), 좌목(座目, 조직), 도설(圖說, 설계도서), 재용(財用, 공사비), 그리고 관련 문서이다.


이제부터는 성설(城說) 8개 항을 바탕으로 비중이 큰 것부터 하나하나 살펴보자.

다산은 화성의 규모를 3,600보로 계획하였으나 실제로 28% 늘어난 4,600보로 끝났다.

첫째, 성의 규모인 푼수(分數)에 관한 계획이다.

다산은 화성의 규모를 3,600보(4.2km)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한 규모는 4,600보(5.4km)였다. 성의 높이도 2장 5척(7.8m)으로 계획하였으나 실제로는 등가 평균 1장 7척(5.3m)으로 쌓았다.


계획보다 길이는 1,000보, 높이는 8척이나 차이가 발생했다. 비율로는 계획 대비 각각 28%, 32%의 변경이다. 건설공사에서 이런 차이는 엄청난 변경이다. 건설관리 제1번은 "규모 관리"이다. 다산은 이 규모 관리(Scope Management)부터 실패했다.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다.


둘째, 성 밖에 설치할 해자(垓子), 즉 호참(濠壍)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방어에 좋은 해자의 설치를 계획했다. 해자를 팔 때 나온 흙을 성의 내탁부에 쓸 수 있어 일거양득이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사방에 자연적으로 깊은 도랑(自然深溝)이 있다"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다.


호참 설치 유무는 공사비, 공사기간, 그리고 전쟁 시설이라는 공사의 품질과 직접 관련이 있다. 건설관리의 제2, 제3, 제4번인 사업비 관리(Cost Management), 일정관리(Time Management), 그리고 품질관리(Quality Management), 모두를 놓친 것이다. 이 역시 좋은 평가를 줄 수 없다. 


해자는 물을 가두어야 하므로 대체로 평지성에 설치한다. 화성은 평지성이 30%도 안 된다. 무엇보다 계획한 성밖에 개울이 있는지 없는지 현지조사(Site Survey)를 했어야 했다. 해자에 대한 기본 지식이 결여되고, 현지조사 한번 없이 계획을 세운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 밖에 연속된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운 것을 해자 또는 호참이라 한다. 적의 접근을 막는 시설이다. 사진은 낙안읍성의 해자이다.

셋째, 성(城)의 견고한 기초(基礎)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기초에 대해 너비를 1장, 깊이는 4척, 재료는 "큰 돌을 사용하면 공사비가 많이 드니 수원부 개천가의 흰 자갈을 쓰면 된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실제 공사는 자갈을 쓰지 않고 큰 돌을 모두 길게 떠서 이를 성곽과 직각으로 배열하여 깔았다. 더구나 그 밑에는 두툼한 박석(礡石)을 1겹에서 3겹까지 깔았다.


공사비가 두려워 원칙을 벗어나는 우(愚)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장인(匠人)과 감동(김독, 監董)의 경험으로 실제로는 견고한 기초를 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실무 경험이 없는 다산에게 좋은 평가를 줄 수 없다.


넷째, 성을 쌓는 재료(材料)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흙, 벽돌, 돌 중 돌을 선택하였다. 벽돌을 제척 한 이유는 땔나무 구하기 어려움과 제작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곳에 벽돌을 사용했다. 옹성, 벽성(甓城), 포루(砲樓), 공심돈, 봉돈 등이다.


돌로 시공이 안 되는 것도 벽돌로 하면 쉽고 공사기간도 단축되는 곳에 주로 사용했다. 무엇보다 재료를 두 종류로 하면 석공과 벽돌공, 돌과 벽돌로 이원화되어 인력수급과 공기단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산은 종합적 판단이 부족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부족했다.

다산은 화성을 석성(石城)으로 계획했다. 의외로 화성에 벽돌을 많이 사용했다. 사진은 북암문 좌우의 벽돌 성 "벽성(甓城)"이다.

다섯째, 돌을 운반하는 수레 만들기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돌의 운반을 중요하게 보고 유형거(游衡車)를 발명하여 제시한다. 유형거는 튼튼한 바퀴, 돌을 싣고 내리기가 편하고, 앞뒤 균형으로 이동에 힘이 덜 드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실제 투입된 현황을 보면, 대차(大車) 8대, 평거(平車) 76대, 유형거 11대, 발차(發車) 2대, 동차(童車) 192대가 투입되었다. 수레는 대차가 40마리, 평거가 5마리, 유형거가 2마리, 발차는 1마리의 소(牛)가 끈다. 우력(牛力)과 투입 대수(輛數)를 보면 유형거의 비중이 크지는 않다.


여섯째, 성을 쌓는 방법에 대한 계획이다.

다산은 성을 쌓을 때 아래로부터 3분의 2는 안쪽으로 1층(1단)에 1치(寸)씩 들이밀고 나머지 3분의 1은 바깥쪽으로 3푼(分)씩 내미는 형상으로 쌓으라고 제안했다. 실제로도 다산의 계획을 따랐다.


다산의 제안과 다르게 수직으로 쌓았다면 구조적으로도, 시각적(美的)으로도 수준 낮은 성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함경도 경성(鏡城)의 성을 벤치마킹했다 할지라도, 다산의 제안 중 가장 잘 된 계획으로 평가한다. 

다산은 돌 운반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유형거(游衡車)를 발명하였다.

일곱째, 채석장 인근에서 돌을 대충 다듬으면 부피와 무게가 줄어 운반에 유리하다는 제안이다. 실제로 부석소(浮石所)를 채석장 인근에 설치하여 계획대로 운영하였다.


여덟째, 석산과 공사장 사이의 가설도로에 대한 계획이다. 공사 전 먼저 만들고, 가능한 한 직선으로, 그리고 평평하게 만들라는 제안이다. 기록은 없으나 실천했을 것으로 본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산의 계획은 3개 항을 제외한 나머지 중요한 5개 항은 채택이 안 되거나 대폭 변경되었다. 형식에서도 같은 경향이 나타난다. 성화주략 원문 전체 분량에서 유형거, 해자, 기초 3개 항이 77%를 차지한다.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뒤바뀐 구성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첫째, 건설의 기초지식이 결여된 계획이다. 둘째, 사전에 현지조사를 하지 않은 계획이다. 이는 치명적 약점이 되었고, 실무경험이 배어있지 않은 "계획을 위한 계획"으로 되었다. 결론적으로 화성성역에 실질적 도움이 안 된 기본계획이라 평가한다.  

성을 쌓는 방법으로 아래로부터 3분의 2까지는 안쪽으로 들이밀고 나머지는 바깥쪽으로 내미는 모양을 제안하였다. 수준 높은 외관이다.

그러면 다산(茶山)의 "기본계획"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용을 보면 다산이 만든 "기본계획"은 기본계획도, 개념설계(Concept Design), 계획설계(Schematic Design)도 아니다. 설계 이전의 설계지침(Design Criteria)이 가장 적합한 용어다. 당시의 건설 프로세스가 이를 증명한다.


당시에는 설계자가 따로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장인(匠人)과 감동(감독, 監董)이 설계, 감독, 시공, 모두를 실행하는 시스템이었다. 다산의 "기본계획"은 앞으로 성역에 참여할 감동, 장인에게 제공되는 지침 혹은 제안서였다. 따라서 "정약용의 화성 설계"란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또한 당시에는 설계를 완료한 후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와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프로세스였다.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패스트트랙(설계시공 동시진행)기법"을 채택했다는 지금까지의 설(說)은 요즈음 건설 프로세스를 기준으로 한 주장이다. 당시에는 모든 공사가 패스트트랙이었다.  

"정약용의 화성 설계"는 사실상 없었다. 다산초당에 모셔진 정약용의 초상이다.

그럼에도 정조는 왜 기본계획을 만들고 공표했을까?


정조의 "어제성화주략" 맺음말에 답이 있다. "그 방법이 비록 개략적인 것이고, 전문적인 견해는 아니라(雖得糟粕) 할지라도, 거기에서 얻는 이익은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益且不淺)"라는 맺음말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조박(糟粕)"이란 표현에서 다산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엿보인다. 다산의 노력, 지식, 논리, 그리고 진취성은 높이 사지만, 실무경험이나 전문성은 부족하다고 엄격하게 본 것이다. "조박(糟粕)"이란 술을 두 번이나 짜내고 남은 찌꺼기인 술지게미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익차불천(益且不淺)" 즉 "이익이 작지는 않다"란 표현에서 화성성역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엿보인다. 이 말에는 "아무리 작아도, 화성성역에 도움이 된다면, 지푸라기라도 쓰겠다"는 정조의 처절한 마음이다. 착수 전 정조의 2대 고민은 공사비 마련과 석산(石山) 찾기였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불취무귀(不醉無歸)" 정신은 백성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다. 수원 영동시장을 지키고 계신다.

오늘은 화성 축성의 기본계획인 다산(茶山)의 "성설(城說)"을 살펴보았다. 외로운 입장에서, 다산과 함께, 화성을 착수하고자 하는 정조(正祖)의 고뇌(苦惱)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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