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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Mar 15.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42

1,000보 늘린 정조의 속마음은 무엇일까?

정조는 공사비 마련과 석산을 찾은 후에야 자신의 미음 속에 있던 "웅대한 화성"의 규모로 확장한다.


1,000보 늘린 속마음은 무엇일까? 


전편에 최초의 화성 규모인 "3,600보 화성"의 모습을 찾아 지도로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정조가 변경하라고 지적한 내용도 살펴보았다.


오늘은 어디를 늘렸을까가 아닌, 왜 늘렸을까? 를 살펴보며 정조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자.


1794년 1월 15일 정조는 팔달산 정상부터 수원을 한 바퀴 돌며 성터를 확정한다. 이때 최초 계획인 "3,600보 화성"의 깃대 표시를 보고 여러 지적을 한다. 아울러 그 이유도 밝히고 있다. 이는 의궤 권 1 연설(筵說)에 기록되어 있다. 연설이란 임금의 자문에 신하가 답한 말을 기록한 것이다. 


1,000보 늘린 정조의 뜻은 무엇일까? 헤아려 보자.

최초의 3,600보 성 모양은 서1치에서 창룡문 옆 동1포루까지 직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 "화성(華城)"에 대한 정조의 생각이다.

성을 늘리더라도 가능한 많은 민가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깃대가 북쪽 마을을 지나가니, 인가(人家)가 많이 훼철될 것이고, 깃대 세운 것을 가늠하여보니 성 밖으로 나갈 인가가 꽤 많을듯하다(人家之當 出城外者)"라고 지적했다.


정조는 관리(官吏)가 아니라 백성과 함께하는 화성을 원했다. "관청(官廳)의 성"에서 "백성(百姓)의 성(城)"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한국의 성은 임금과 관리가 사용하는 면적이 성내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화성은 거꾸로 민가가 차지하는 면적이 대부분이다.


둘째, "화성부(華城府)"에 대한 정조의 생각이다.

정조는 화성부의 미래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적을 통해 남북 간 거리를 계획의 1.5배, 가용면적은 2배 확장되었다. "성(城)이 거의 행궁의 담처럼 보인다(殆若墻面)", "성터의 남북 간 거리가 너무 가깝다(亦爲太近)"라고 지적하며, "이것은 먼 미래를 경영하는 도리가 아니다(非經遠之道)"라고 정조는 말했다.


정조의 꿈은 화성을 상업 도시, 농업 도시, 군사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금"이 아닌 "미래(未來)의 화성부(華城府)"에 대한 포석이다. 선경, 삼성, 농촌진흥청, 공군전투비행단은 수원 발전의 모태이다. 정조의 예언대로 실천된 것이다. 

전체 모양이 현재의 "4,600보 화성"이고, 붉은색 선이 최초의 계획 "3,600보 화성" 형상이다. 동서로 길다.

지금부터는 정조(正祖)의 속마음이다. 

"화성성역(華城城役)"에 대한 정조의 생각이다.

바로 코앞에 성역(城役)이 시작된다. 그래서 경제성과 라이프사이클 비용을 중시한다. 모든 지적에는 방어전략, 공사기간, 공사비, 그리고 완공 후 장기간의 유지관리까지 숨어있다. 


첫째, "성이 북쪽 마을을 지나가게 되어 인가(人家)가 많이 훼철될 것이다"라는 말속에는 철거, 이주, 신축 등 공사비와 공사기간을 감안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북성 전체에서 철거한 민가가 초가집(草家) 18호(戶)뿐 이었다. 반면에 길이가 북성의 40%밖에 안 되는 남성에서는 철거한 초가집은 20호나 되었다.  


둘째, "용연(龍淵) 위에 우뚝 솟은 용두(龍頭)는 정기와 신령함이 있으니 그 위로 성을 쌓으라"라고 지적했다. 이 말 속에는 높은 바위는 방어에 유리하고, 방어에 취약한 좌우의 북수문과 북암문을 방어하기 쉽고, 물막이 역할로 재해 예방에 유리한 점을 감안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용연을 중심으로 화홍문, 방화수류정 일대는 화성 방문객은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가장 핫(Hot)한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도 정조의 예언은 맞았다. 북수문에게 "화홍문", 동북각루에 "방화수류정", 동북포루에 "각건대"라 별칭을 하사하였다. 문(門) 4곳을 제외하고 별칭을 하사한 4곳 중 3곳이 이곳에 모여있다. 

용연 위 용두(龍頭)를 감싸 성을 쌓는 것이 좋다고 지적했다. 용두는 북수문인 화홍문을 지키는 요충지이다.

셋째, "내문성에 석성을 쌓고, 외문성에 따로 토성을 쌓아, 내문성을 보호하려는 뜻은 알겠다. 그러나 내 뜻은 외문성에만 성을 쌓는 것이 좋다"라 말하였다. 이 말에는 2가지 뜻이 들어있다.


하나는,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을 겹으로 쌓아 공사비와 공사기간을 이중으로 투입하는 문제를 없애려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토성은 방어에 신뢰할 수 없는 구조이고, 장기적 유지관리비가 많이 든다는 점을 감안하였을 것이다.


넷째, 이 지적은 필자가 보기에 모든 지적 중 화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지적으로 평가한다. "성터의 남북 간 거리가 너무 가깝다(南北相距 亦爲太近)"라는 지적이다. 이 지적은 성역 전체에 명운이 걸린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최초의 "3,600보 화성"은 동서 간 거리가 남북 간 거리보다 길다. 긴 길이보다 평지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 것이 문제이다. 성 높이는 평지성이 산상성의 4분의 1만큼 더 높다. 이 증가에 소요되는 돌의 준비, 성 쌓기는 어마어마한 공사량이다. 


또한 일부분만 채우는 산상성 내탁과 달리 평지성 내탁은 전체를 쌓아야 한다. 엄청난 량의 흙을 파고, 운반해 오고, 층마다 다져가며 내탁을 쌓아야 한다. 


3.600보 경우 평지성 비율이 41%이고, 4,600보 경우 30%이다. 계산해 보니, 1,000보를 늘렸는데도 평지성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놀라운 결과다.     

내문성에서 외문성으로 성의 루트를 바꾸었다. 바꾼 덕분에 사진 속의 각건대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정조의 지적으로 일자문성(一字文星)에서 외문성(外文星)으로 연결하여 성을 쌓도록 변경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Game-Changer)"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하지만 결과가 좋다고 정조의 행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임금 마음대로 계획을 바꾼다면 계획은 왜 세웠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기본계획 "성설(城說)"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어제성화주략" 제1항인 규모 3,600보는 무엇이란 말인가?


"성설"과 같은 기본계획의 규모는 사업 초기단계의 수치이다. 쉬운 예로, "년 1,000만 톤을 생산할 수 있는 비료 공장을 짓는데 땅이 얼마나 필요합니까?"라는 건축주의 물음에 대한 답과 같은 개념이다. 실제와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행궁과 인가(人家) 1,000호(戶)를 품을 수 있는 성의 규모는 얼마면 되겠느냐?"라는 정조의 질문에, 다산은 "성 둘레가 3,600보(步) 라야 계획한 바에 들어맞습니다(可以苟用)"라고 답했다. 이것은 사업 초기단계의 규모로 보면 된다는 의미이다.  

기본계획의 3,600 보라는 규모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업 초기단계에서 본 규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딴 이야기로 간다. "다산이 기본계획을 쓰기 전 현지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정합니까?"라는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현지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확정해 말한 근거는 첫째, 정조가 원한 규모는 현지조사가 필요 없는 규모였기 때문이다. 


둘째, 다산이 성설에 "일찍이 수원부에 있는 개천가를 본 적이 있는데(嘗見府內川邊)"라고 기록했다. 여기에서 상견(嘗見), 즉 "일찍이 가본 적이 있다"라는 말은 이번이 아니라 이전에 간 적이 있다는 의미이다. 유배나 외직을 갈 때 꼭 수원을 지나게 된다.


다산은 "성설"을 만들 때 현지를 가 볼 필요가 없었다. 실제 가지도 않았다. 이런 사실에도 어느 화성 연구가의 저서에 "다산의 구상은 성벽이 팔달산 정상에서 남북으로 산등성을 타고 내려와서"라고 구체적 지형지물까지 쓰고 있다. 난감하다. 


잠시 딴 이야기를 하였다.

이래서 "다산의 3,600보 화성"은 실제와 차이가 있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필자가 평가하기에 다산(茶山)의 예상치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규모였다. 다만, 다만, 정조(正祖)가 품은 "웅대한 화성"에 대한 꿈까지 간파하지 못했을 뿐이다. 마음속 "웅대한 화성"은 바로 "정조의 4,600보 화성"이었다.  


오늘은 최초의 화성 계획을 서슴없이 확대한 정조의 속마음을 읽어보았다. 함께 "성설(城說)"이나 "어제성화주략"의 규모 계획에 대한 정체성도 살펴보았다.


정조(正祖)에겐 백성사랑, 미래확장은 속마음이고, 더 깊은 속마음에 공사비, 공사기간, 방어전략 같은 "경영(經營)과 실용(實用)"이 있었음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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