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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Apr 12.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46

천하무적(Invincible)! 화성 기우제(祈雨祭)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龍淵)은 화성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 중 하나이다.


천하무적(Invincible)! 화성 기우제


화성의 시설물은 19개 유형에 60개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시설물 수가 가장 많은 유형은 치(雉)로 8곳이다. 가장 적은 유형은 봉돈, 성신사, 용연, 용도로 각각 1곳씩이다.


그리고 전쟁 시설물이 아닌 것으로는 용연, 성신사가 있다. 성역 당시 경비 마련이 힘들었을 터인데 왜 군사시설이 아닌 이런 시설을 지었을까? 하지만 후대에 사직단(社稷壇), 팔달산, 광교산, 축만제(祝萬堤)와 함께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장소로 활용된 기록이 있다.


"수원부 계록(水原府啓錄)"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수원 유수부에서 비변사(備邊司, 후에 의정부)에 올린 각종 문서인 "화영 계록(華營啓錄)"을 비변사가 정리한 것이다. 아쉽게도 1845년부터 1877년까지만 남아 있다.


군영(軍營)을 갖춘 4곳의 유수부(留守府)인 개성, 강화, 수원, 광주를 송영(宋營), 심영(沁營), 화영(華營), 광영(廣營)이라 불렀다. 수원이 "화영"이라 "화영(華營)계록"이 된 것이다. 

성신사(城神祠)는 화성의 성신(城神)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당시는 농업이 백성 경제와 국가 세금(稅金)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대라서 강수량, 가뭄, 홍수 등 날씨에 대한 보고와 씨 뿌리기, 모내기, 물대기, 수확 등 농사에 대한 세세한 보고가 많았다.


이 중 기우제에 대한 내용은 3건이 보인다. 1853년, 1867년, 1876년이다. 각각 철종 4년, 고종 4년, 고종 13년이다. 이로 보아 대략 10년에 한 번 큰 가뭄이 있었던 셈이다.


기우제 실시 절차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농사에 지장이 많을 경우 수원부 유수가 실시 3일 전후에 결정하고, 보고하고, 실무자에게 준비 지시를 내린다. 기우제를 지낸 후에도 실시 내용을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장소를 특정하지 않았으나 팔달산도 기우제 장소의 하나다. 팔달산은 화성의 진산(鎭山)이다.  

기우제는 누가 지낼까?

첫 번째 기록인 철종 4년인 1853년 7월 18일에 실시한 기우제의 제관(祭官)에 대해 살펴보자. 이후도 직분은 똑같다.


헌관(獻官) 수원부유수 서영순

전사관 겸 대축(典祀官,大祝) 수원부판관 김기조

축사(祝史) 영화도찰방 김기헌

재랑(齋郞) 별중사파총 박연원

찬자(贊者) 좌사파총 한용신

알자(謁者) 좌사우초관 오창묵


제관을 보면 사도세자와 정조의 왕릉에 올리는 제향(祭享)이나 화령전에 올리는 제사의 제관과 직위가 똑같다. 이것은 기우제도 국가나 지방관서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儀式)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직단(社稷壇)도 수원부의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보훈원 뒷산으로 추정된다.

기우제는 어느 날 지낼까?


7월 4일 기우제를 6일에 실시할 것을 계획하고,

7월 6일 첫 번째 기우제를 사직단에서 지냄

7월 9일 두 번째 기우제를  팔달산에서 지냄

7월 12일 세 번째 기우제를 광교산에서 지냄

7월 15일 네 번째 기우제를 용연에서 지냄

7월 18일 다섯 번째 기우제를 성신사에서 지냄. 18일에 1치 5푼, 20일에 6푼의 비가 와서 계획된 기우제를 중단함


이 일정을 보면, 기우제는 3일 간격으로 연속해서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우제는 강우량이 많거나 적거나 관계없이 비가 내려야 중단하고 있다. "18일에 1치 5푼(45mm), 20일에 6푼(18mm)의 비가 내려 다음번 기우제를 중단하였다"라고 하였다. 


비가 오는 량은 무엇으로 확인할까?


강우량의 일반적인 표현은 농기구인 호미와 쟁기를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쟁기질 1번 할 정도"라든가 "호미질 2번 할 정도" 등으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수원이 과학과 실용의 도시답게 1치 5푼 또는 6푼 등 수치를 꼭 겸하여 기록하고 있다.


강우량은 화성행궁 내 유여택(維與宅) 앞마당에 놓여있는 측우기(測雨器)로 측정된다. 의궤 유여택도(圖)에 분명히 보인다. 유여택은 지금으로 말하면 수원시장 집무실이다. 정조의 행차 시에는 임금이 이곳에서 업무를 본다.


이 측우기의 강우량이 화성 강우량의 공식적인 기준이다. 현재 유여택 앞마당에는 측우기는 없고, 해시계가 놓여 있다. 측우기가 현장성이 있는 것인데 해시계를 비치해 놓으니 참 생뚱맞다. 측우기와 유여택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의궤에는 유여택 앞마당에 측우기(測雨器)가 놓여 있다. 화성 강우량 측정의 기준이다.
현재 유여택 앞마당에는 해시계가 놓여 있다. 개념이 없는 것 같다.

기우제는 어디서 지낼까?


장소는 사직단, 성신사, 팔달산, 광교산, 용연, 축만제이다. 연속적으로 한 곳에서 지내지 않고 교대하며 지내고 있다.


사직단(社稷壇)은 팔달산 서쪽에 있었으나 성역이 끝나기 1년 전 광교산 서쪽 산록으로 옮겼다. 지금은 유실되었으나 위치는 현재 보훈원 뒷산이다.


성신사(城神祠)는 성역이 끝나는 해에 정조의 특별한 지시로 만들었다. 화성의 안녕을 위해 성의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매년 두 번 제사를 지냈다. 화성행궁 주차장에서 잠시 오르면 바로 나온다.


용연(龍淵)은 방화수류정 아래에 있는 원형 연못이다. 성역 이전에 자연스레 있던 물웅덩이를 확장하고 꾸민 것이다. 방화수류정, 화홍문, 각건대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축만제(祝萬堤)는 둔전(屯田)인 서둔(西屯)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화성의 3번째 저수지이다. 첫 번째는 만석거(萬石渠)이고, 두 번째는 만년제(萬年堤)이다. "서호(西湖)"라 불린다. 지하철 1호선 화서역에 붙어있다.


팔달산과 광교산의 경우는 구체적 기록이 없어 특정할 수 없다. 다만 하늘과 가까운 능선보다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나 깊은 계곡부가 기우제에 더 의미 있는 장소라고 본다. 용연과 축만제도 물과 관련 있는 장소이다.   

저 멀리 광교산(光敎山)이 보인다. 저 산 어디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하늘 가까운 곳일까? 마르지 않는 물 가까이 일까?

정리하면, 화성 기우제의 특징은 첫째, 10년마다 극심한 가뭄이 있었다는 점. 둘째, 장소로 화성성역 당시 건설된 시설인 용연, 성신사, 축만제, 사직단에서 실시되었다는 점. 셋째, 기우제 격식이 왕릉과 화령전의 제향(祭享)과 똑같은 품격을 유지한 점이다. 


넷째, 가장 놀라왔던 것은 "인디어 기우제"와 같다는 것이다. 한번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인디언 기우제"처럼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강우량과 관계없이, 비가 올 때까지, 3일 간격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고종 13년인 1876년에 실시한 기우제는 "인디언"도 질려 도망갈 그런 기우제였다. 비가 올 때까지 이틀, 삼일 간격으로 무려 26번의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첫 번째 기우제를 시작으로 8번을 지낸다. 이후 이틀에 걸쳐 비가 조금 왔기 때문에 중단했다. 비가 더 이상 안 오자 다시 12번을 지낸다. 이때 비가 안 왔는데도 중단한다. 이유는 "기우제는 12번이 한계"라는 예전(禮典)의 규정 때문이었다. 잠시 쉰 후 다시 6번을 지냈다. 6번째 기우제를 지내고 비가 내려 끝낼 수 있었다. 총 26번의 기우제 후 고양이 오줌 같은 5mm의 비가 온 것이다.     

농사를 통해 백성이 먹고 살고, 나라도 세금을 거두어 드릴 수 있다. 기우제는 왕릉에서 제사드리는 같은 수준으로 지냈다.

화성(華城) 기우제(祈雨祭)는 어떤 귀신(鬼神)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시스템이다. 천하무적, 화성 기우제다. 전쟁 시설물은 아니지만 후대를 위해 마련한 용연, 성신사, 사직단, 축만제를 보며 정조(正祖)의 후대(後代) 사랑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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