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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Apr 26.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48

세계 최대의 화성 내탁(內托)

평지성 내탁의 크기는 얼마일까? 현재 복원된 내탁의 크기보다 클까? 작을까?


세계 최대의 화성 내탁(內托)


성(城)을 쌓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협축(夾築)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내탁(內托) 방식이다.


현축(夾築)은 성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를 인공적으로 돌로 쌓는 방식이다. 좋은 예가 순천의 낙안읍성과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낙안읍성이나 만리장성에 올라 보면 안팎이 모두 돌로 쌓은 성면(城面)만 보인다.


내탁(內托)은 성 바깥쪽만 돌로 쌓고 안쪽은 산(山)이나, 인공적으로 쌓은 흙더미에 성을 의지시키는 방식이다. 성 안쪽으로 붙어있는 흙더미가 바로 내탁이다.  


내탁의 모습은 화홍문과 화서문 사이에서 볼 수 있다. "내탁 크기"는 흙더미의 두께를 말한다. 방문객이 다니는 성 위 길을 내탁 "위 두께" "위 너비"라 한다. 아래 두께는 내탁이 끝나는 곳까지의 두께를 말한다.

관람객이 다니는 성 위의 길을 성상로(城上路)라 한다. 이 부분을 내탁의 "위 두께" 혹은 "위 너비"로 부른다.

평지성의 "내탁 크기"는 얼마일까?

현재의 북서포루 인근을 실측해 보았다. 내탁 위 너비는 4m이고, 아래 너비는 12m이다. 이 수치는 돌로 쌓은 성 두께가 포함된 것이다. 성 두께는 1m 전후가 된다.


그러면 당초 성역 당시의 내탁 크기는 얼마였을까? 


의궤에서 "내탁 크기"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의궤에는 "내탁의 크기"가 아닌 "성 두께의 합계(通計城厚)"로 나오기 때문이다. 권수(卷首) 도설(圖設)에 "성 두께의 통계가 아래는 대체로 5장쯤(下可五丈) 되고, 위는 거의 3장 정도다(上收三丈)"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의궤 기준 내탁 크기가 아래 두께는 5장(丈)이고, 위 두께는 3장이다. 1장(丈)은 10척(尺)이므로, 환산하면, 아래 두께는 15.5m, 위 두께는 9.3m가 된다.


현재 복원된 크기와 성역 당시의 크기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 

왼쪽 그림이 의궤 기준의 내탁 크기이고, 오른쪽이 현재 복원된 상태의 내탁 크기이다. 내탁 "위 두께"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먼저, 내탁 전체의 크기라 할 수 있는 아래 두께를 보자. 아래 두께는 의궤에 15.5m인데, 현재 복원된 상태는 12.2m이다. 복원 상태가 의궤 기준보다 3.3m가 짧다. 의궤의 80% 수준이다.


다음, 위 두께는 의궤에 9.3m인데, 현재 복원된 상태는 4m이다. 복원 상태가 의궤 기준보다 5.3m가 짧다. 의궤 기준의 40% 정도뿐이 안 된다.


정리하면, 첫째, 위아래 모두 짧게 복원되었고, 둘째, 위 두께는 의궤 기준의 반(半)도 안 될 정도로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 놀라웠다. 왜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게 복원했을까?

일제 침략기와 6.25 전쟁을 치르며 수원에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다. 성 안팎은 많은 움집, 판잣집, 초가가 내탁을 잠식하고 있었다.

위 두께는 의궤에 30척, 즉 9.3m이다.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너비로 했을까? 이 또한 화성의 미스터리다.  


먼저, 기존의 통설을 보자. 여러 학자들은 무기의 변화에 따라 내탁을 크게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활, 쇠뇌 같은 무기에서 총, 대포 같은 화기(火器)로 발달되어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내탁을 두껍게 했다는 논리다.


그러나 화성은 성 돌(城石)의 뒷길이가 전면 크기의 1.7배 전후로 성벽 자체가 두꺼운 통 돌과 같이 견고하다. 포탄에 맞은 부분만 깨지지, 연쇄적으로 붕괴되는 구조가 아니다.

성역 당시에는 내탁의 전체 크기가 북지(北池)와 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는 도로가 개설된 상태이다.

그러면 왜 많은 부분을 복원하였느냐 지적하실 것이다. 당시 복원한 부분은 대포에 맞아 부서진 것이 아니라, 자연재해와 사람에 의한 훼손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나간 형상이 인위적 훼손임을 증명하고 있다. 


필자가 보는 내탁을 늘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城)의 방어력을 대폭 증가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행위이다. 내탁의 너비와 방어력이 무슨 관계일까? 여장 뒤 내탁이 넓을수록 무기와 병력의 비축과 이동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권 2(卷二) 절목(節目)에 보면 성 위 타(垜)마다 비치할 품목이 기록되어 있다. 매 타마다 현등(懸燈), 경보용 목탁, 조총, 창, 돌멩이 100개, 칼, 도끼, 곤봉, 화살, 낭기포(5타마다), 무게 200근 큰 돌 3개(10타마다), 물항아리, 취사기구를 비치했다.

평지성 내탁 크기로는 화성의 내탁 규모가 큰 편이다. 화포 등 무기의 발달로 크게 했다는 통설이 맞는지 살펴본다.

여장 뒤에 2중, 4중, 6중으로 병사를 많이 배치하고, 무기 등 병참(兵站)도 많이 비축될수록, 빨리 공급될수록, 신속히 이동될수록, 전력은 극대화되는 것이다. 내탁 너비 자체가 적에게는 무시무시한 방어력이 된다. 


이를 꿰뚫고 있는 전략가 정조(正祖)는 화성 내탁에 대한 그의 기준을 말한다. 의궤 권 1(卷一) 윤음에 "말 5 필과 수레 2 채가 다닐 정도의 너비로 만들라(俾容五馬兩軌)"라고 지시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내탁이 화성에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내탁을 넓게 하면 공사비와 공사기간이 많이 들지 않느냐 하실 것이다. 정조는 하나를 내주고 여럿을 얻는데 탁월한 분이다. 방어력을 증강한 정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내탁 재료인 흙은 오랜 기간 눈비에 유실된다. 두께를 늘려 내구성(耐久性)과 내후성(耐候性)을 위해 안전율을 높인 것이다.  


둘째, 방어력을 높인 대신, 성 높이를 계획보다 줄여 공사비와 공기를 대폭 줄인 것이다. 닭 주고 소 받은 셈이다. 당초 높이 2장 5척에서 평지성에서는 2장으로, 산상성에서는 1장 6척으로 줄인 것이다. 화성 전체의 30%나 줄인 결과가 되었다.   

정조(正祖)는, 성 높이는 못 따라가도 내탁의 위 두께, 위 넓이는 만리장성보다 더 넓게 했다. 새로 복원할 평지남성을 기대해 본다. 

셋째, 장안문 밖에 둔전(屯田)을 만들며 나올 흙을 처리하기 위해서다. 화성을 지킬 군대를 위한 운영비, 화성을 유지 보수하는 수성고(修城庫)의 경비를 만들고, 성역을 마친 백성이 화성에 정착하도록 농토를 주기 위한 개간 사업이었다. 


넷째, 정조(正祖)는 화성에 세계 최대의 내탁을 만들 꿈을 실현한 것이다. 만리장성의 2배가 넘는 내탁을 만든 것이다. 만리장성의 위 너비는 4.5m에서 5m 정도이다.


정리하면, 자연재해를 감안한 구조적 차원, 무기와 병력의 대량 비축과 신속 이동으로 방어력을 높인 전략적 차원, 대규모 농토인 둔전을 만들며 나오는 흙을 처리한 실용적 차원, 성 높이를 줄여 더 큰 공사비와 공사기간을 절약한 건설경영 차원, 만리장성을 능가하고 싶었던 정신적 차원의 결정체로 보면 된다. 

화성 복원은 내탁의 크기가 의궤 원형으로 복원되어야 완성이 되는 것이다.

수원시는 미 복원인 평지남성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화성 전체가 이어지면 화성은 제2의 탄생이 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의궤대로 내탁을 원형 복원하는 것이다. 새로 복원되는 세계 최대의 내탁은 화성의 면모를 완전히 바꿔 줄 것이다. 


화성의 내탁(內托) 크기를 통해 정조(正祖)의 실용(實用), 건설경영(建設經營), 전략(戰略), 그리고 꿈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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