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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May 03.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49

내탁용 흙은 어디서 갖고 왔을까?

화성의 내탁 크기는 만리장성보다 더 넓다. 덤프트럭이 없던 성역 당시 그 많은 흙을 어디서 갖고 왔을까?


내탁용 흙을 어디서 갖고 왔을까?


화성 내탁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큰 만큼 많은 흙이 필요하다. 내탁에 필요한 흙은 얼마나 될까?


의궤에 내탁 크기는 아래 두께 5장(15.5m), 위 두께 3장(9.3m), 높이 2장(6.2m)이다. 돌로 쌓은 성 두께 3척 5촌(1.1m)을 감안하여 단면적(斷面積)을 산출하면 73제곱미터가 된다. 길이와 할증(割增)을 곱하면 평지북성은 10만 입방미터, 평지남성은 4만 입방미터의 흙이 필요하다.  


내탁 공사는 먼저 성 돌(城石)을 1줄 쌓고, 성 안쪽으로 10cm 높이의 흙을 깐다. 이를 목저(木杵)로 충분히 다진 후 그 위에 다시 10cm의 흙을 깔고 다진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성의 높이까지 쌓아 올라가는 방식이다. 


이처럼 흙을 파내고, 운반하고, 붓고, 다지는 것을 토공사(土工事)라 한다. 토공사는 재료인 흙을 어디서 갖고 오느냐, 즉 운반 거리에 따라 공사비에 큰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흙을 파내어 가져올 곳은 사용할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기본이다. 

내탁을 쌓을 때 흙을 다지는 기구다. 왼쪽이 당시에 사용하던 목저(木杵)이다. 4명이 들어 올렸다 내려지면서 흙을 다진다.

따라서 취토장은 평지성에서 가장 가까운 산(山) 일 가능성이 크다. 의궤 도설(圖說)에 채석장(採石場)은 위치까지 기록했는데, 취토장(取土場)은 기록이 없어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일부 학자들은 파지도 않은 호참(濠塹, 해자, Moat)에서 흙을 조달했다거나, 연못을 파서 충당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


취토장 위치가 공사와 관계없는 권 1(卷一) "구휼(救恤)과 둔전(屯田)에 관한 윤음"에 숨어있는 것을 어렵사리 찾아냈다. "북성 밖 가까운 곳(北城外咫尺)"이다. 이 윤음의 실행 규칙인 부편(附編) 절목(節目)에는 "장안문 밖으로부터(自長安門外) 고등촌 북쪽 들 황무지까지(至古等村北坪陳荒處)"라고 조금 더 자세하다. 


지금으로 보면 어디가 될까?

기록에 나온 "북성 밖 가까운 곳(北城外咫尺), 장안문 밖으로부터(自長安門外), 고등촌 북쪽 들까지(至古等村北坪), 100곡 뿌릴 면적(播百斛之境界)"을 감안하면, 수성중 사거리, 만석공원 사거리, 대유평 사거리, 영복 사거리를 잇는 사방 1km 지역이다.

북문과 서문 밖에 걸쳐 정조가 만든 둔전인 대유평의 일부이다. 6.25 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찍은 사진이다.

주제를 벗어나, "윤음"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윤음은 그 해의 큰 이슈에 대해 임금의 뜻을 알리고 신하에게 명령하는 글을 말한다. "윤"은 "낚싯줄 윤" 자를 사용한다. 그 유래가 자못 의미 있다.


"임금의 말이 실(絲) 같으면 입으로 나오는 것은 굵은 실(윤)이 되고, 임금의 말이 굵은 실(윤) 같으면 나오는 것은 밧줄(綍 발)과 같다"라는 "예기(禮記)"의 글에서 "윤"이란 글자를 따왔다 한다. "통치자의 말은 본의 아니게 크게 확대 해석된다"는 경고와 교훈의 의미가 담겨있다. 


정조(正祖)는 성역을 시작한 후 장용외영(壯勇外營)의 운영, 화성(華城)의 유지관리, 화성 성민(城民)의 정착과 삶에 대한 계획에 골몰한다. 그 대책이 대유평(大有坪)과 만석보(萬石渠)로 나타난다. 대유평은 농사지을 농토이고, 만석거는 늘 물을 공급할 저수지이다.

넓은 농토(屯田) 대유평(大有坪)을 비옥하게 한 일등공신 만석거(萬石渠)이다. 수원에선 "조기정 방죽"이라 불렀다.

정조는 농토를 만들며 나올 막대한 흙의 처분을 고민한다. 결국 화성의 내탁에 활용할 것을 결정하고, "그 흙(其土)을 성신에 붙이어(粘附城身) 말 5 필과 수레 2 채(五馬兩軌)가 다닐 정도의 너비로 만들라" 하였다. 


필자는 "북성 밖에서" 흙을 갖다 쓰라는 말을 듣고 "정조(正祖)의 오판(誤判)"이라 생각하고 혀를 찼다. 왜 이렇게 먼 곳에서 갖고 와야 할까? 토공사의 기본 개념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가까운 산에서 갖고 오면 운반 거리가 북성 경우 400m, 남성 경우 200m 이내가 된다. 그런데 북성 밖은 북성까지 1.5km, 남성까지 3km가 된다. 북성은 4배, 남성은 15배나 먼 거리에서 오는 형국이다.  


왜 정반대로 먼 곳을 지정했을까? 정조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일까? 

성역 당시에는 흙을 파고 싣는 것은 모두 삽과 굉이를 이용해 모군(募軍)이라는 잡부가 인력으로 하였다.  

첫째, 당시에는 흙을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가 아닌 삽과 굉이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만 파 올렸다. 가까이 위치한 산의 비탈진 지형은 인력으로 땅을 파고 싣는 작업에 맞지 않았다. 따라서 멀어도 평지를 택한 것이다.


둘째, 당시에는 흙을 덤프트럭이 아닌 우마차로 운반했다. 우마차는 산에 오르지도 못하고, 흙을 싣는 동안 비탈에 세우지도 못한다. 따라서 멀어도 평지를 택한 것이다.


주략(疇略)에도 "운반로는 숫돌 면(治道如砥)처럼 평평하고, 화살처럼(治道如矢) 곧아야 한다"라고 했다. 같은 평지라도 울퉁불퉁하거나, 커브가 많으면, 오히려 새로 길을 만들어야 했다. 


셋째, 황무지를 개척해 농토와 수로를 만들며 나오는 흙을 활용한 것이므로 따로 산을 파헤칠 필요도 없었다. 자연보호 건설이다. 필자는 미국 친환경 건축 평가사(LEED AP)이다. 황무지를 이용할 경우 가산(加算) 점수를 주는 평가 규정이 있다. 친환경 건설이다.  

토공사에서 흙의 운반 거리는 공사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성역 당시 덤프트럭은 우마차였다. 우마차 바퀴는 나무였다.

종합하면, 북성 밖이 당시의 굉이, 삽, 우마차, 인력 작업으로는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취토장(取土場)이었다. 새로 길을 만들지 않고, 평탄하고 커브가 없는, 기존의 한양 길을 활용한 것이다. 


필자는 어리석게도 1795년을 2021년의 눈으로 보려 하였다. 운반 거리가 멀어도 평탄한 길이 아니면 안 되었던 당시의 토공사(土工事) 기본 개념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론은 여기서 끝내고, 둔전(屯田) 대유평에 대해서도 몇 가지 알아보자. 먼저, 전체 면적은 얼마나 될까?


윤음에 "100곡가량 뿌릴만한(播百斛之) 면적"이라 하였다. 1곡(斛)은 10말(斗)이므로 100곡은 1,000말이 된다. 1말의 씨는 1마지기의 논이 필요하므로 1,000마지기의 논이 필요하게 된다. 1마지기를 300평으로 보면 면적은 30만 평이된다. 사방 1Km 규모이다. 

대유평(大有坪)을 가뭄에도 기름지게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준 물의 공급처, 만석거(萬石渠)의 겨울이다.

그리고, 토공사 인부에게 품삯은 어떻게 주었을까?

첫째, 고정급이 아닌 능률급으로 지급했다. 정조는 "날품(以日)으로 하지 말고, 짐 수(以負)로 따져 주라" 하였다. 효율성이다.


둘째, 운반거리에 따라 차등을 두어 정산했다. "거리의 멀고 가까운 데에 따라 차등(遠近而差等)을 두라" 하였다. 정조의 공평성이다.


셋째, 최저 임금을 보장해 주었다는 점이다. "힘이 약한 사람도 저 먹을 벌이는 되게(弱者足庇一身) 하라" 지시하였다. 어려운 백성을 배려하는 정조의 정의(正義)가 배어있다. 


그리고, 왜 농토(屯田, 둔전)를 개간했을까?


정조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백성에게 농토를 주어 정착시켰고, 일부를 세(稅)로 거두어 화성 수리(修城庫)를 위해 대비하였고, 병농일치(兵農一致) 정책으로 장용외영(壯勇外營)의 군대 예산을 스스로 마련하게 하였다.


또한 내탁에 사용할 막대한 흙을 얻었고, 30만 평의 논, 실핏줄 같은 수로(水路)는 적의 공격 루트를 차단하는 역할도 하였다. 정말 1거6득(一擧六得)이다.  

정조는 수원천에 나와 대유평 쪽으로 물길을 내어 가뭄에도 물을 대도록 지시하였다. 드라마 "이산"의 해당 장면이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만 한 것이 아니라, 성을 유지(修城)하고, 성을 지키고(守城), 성 안에 많은 백성이 모여 자족(自足)하며 정착하는 지속가능(持續可能)한 도시를 실현시킨 것이다.  


내탁부의 흙을 갖고 온 곳을 밝혀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먼 곳을 택했을까? 를 살펴보며, 정조(正祖)의 지속 가능한(Sustainable) 정책 실천과 공정, 정의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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