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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Jun 13.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55

화성행궁 안 구경- 정조의 노후계획

정조는 노후를 위해 어머니와, 그리고 백성과의 기억과 추억의 공간을 마련하였다.


화성행궁 안 구경-정조의 노후 계획


정조의 노후 계획 - 기억과 추억

오늘은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과 백성과의 추억 공간을 찾아볼 예정이다. 아버지 능을 화성으로 모신 후 매년 원행(園幸)을 하였다. 특히 을묘년(1795년)에는 8일간 대규모 원행이 있었다. 바로 "을묘원행"이다. 이때의 모든 행사를 기록한 것이 "을묘원행정리의궤"이다. 그리고 "화성능행도"가 있다.


원행(園幸)을 행(行)이 아닌 행(幸)으로 쓰는 것은 이유가 있다. "왕의 수레가 머무는 땅(駐駕之地)에는 반드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기(必有恩澤) 때문에 왕의 행차를 행행이라 부르라(行幸之稱)"는 정조의 하교(下敎)가 있었다.


실제로 행행(行幸) 때마다 백성과 지방에 많은 혜택을 주었다. 지방에서 별시(別試)를 치러 지방 인재를 등용하였고, 세금 면제, 농토 지급, 한양에서 내려온 관리에게 주택 특별공급(특공) 등을 하였다.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듣기도 하였다.  

어머니 회갑잔치를 화성행궁 안 봉수당에서 큰 잔치로 베풀었다.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봉수당, 장락당

봉수당(奉壽堂)은 행궁의 정전이지만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의 집무실로 쓰였다. "봉수(奉壽)"란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奉) 빈다"라는 의미로 정조가 어머니 회갑에 쓴 시에서 따왔다 한다.


특징은 임금이 머무는 건물인데도 단청이 없다. 본인에 엄격했던 정조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출입은 4통8달(四通八達)이다. 중양문(中陽門), 건장문(建章門), 경선문(慶善門), 지락문(至樂門)을 통해 행궁 밖, 노래당, 낙남헌, 장락당으로 소통된다.


화성능행도에 "봉수당 진찬도(進饌圖)"라는 이름으로 회갑잔치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있다. 을묘년에 어머니 회갑을 맞아 8일간의 원행 중 5일째 날에 봉수당에서 회갑연을 베푼 모습이다.


아래는 "진찬도"에서 윗부분 모습이다. 봉수당에는 정조와 혜경궁이 있고, 앞마당에는 친인척 내빈과 외빈이 보인다. 배를 가운데 놓고 악사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무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회갑연은 정조 재임 중 가장 큰 잔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이렇게 잔치를 크게 하였을까? 필자는 정조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정조에게는 어머니 회갑이 어머니만의 회갑이 아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어머니 혜경궁과 동갑내기였기 때문이다. 어머니 회갑은 아버지 회갑이기도 했다.


이처럼 봉수당은 어머니뿐 아니라 먼저 세상을 뜬 아버지도 함께한 기억의 공간이다.

봉수당 진찬도의 윗부분이다. 어머니와 정조가 봉수당에, 인척, 내빈, 외빈이 마당에, 악공과 춤추는 무희의 모습도 보인다.

장락당(長樂堂)은 어머니 혜경궁이 머물던 곳으로 봉수당 남쪽에 있다. 어머니를 향한 정조의 효심(孝心)을 건축 공간에서 몇 가지에서 찾아본다.


첫째, 장락당 이름은 직접 정조가 지었고, 친필로 현판을 썼다. 장락(長樂)의 의미는 "어머니의 만수무강과 오랫동안 즐거운 삶을 즐기시라"라는 효심을 담은 말이다.


둘째, 장락당을 지을 때 마루를 통하여 바로 봉수당으로 오갈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원래는 앞마당을 지나 지락문(至樂門)으로 나가 돌아서 봉수당으로 다시 올라가는 동선이었다. 어머니의 불편함을 줄여드리려 한 효심이 보인다.


셋째, 장락당에 통하는 문의 이름에서 어머니를 향한 정조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지락문(至樂門, 즐거움에 다다르다), 다복문(多福門, 복이 겹치다), 장복문(長福門, 복이 오래가다), 경화문(慶華門, 경사와 영화는 편안함에서 시작된다), 유복문(維福門, 복을 묶다)이다.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은 즐거움, 복, 영화 등 효심을 표현하고 있다.  

봉수당 뒤편의 일부가 장락당과 겹쳐지었다. 마루를 통해 바로 봉수당에 갈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정조는 봉수당과 장락당에 어머니와의 즐거웠던 기억의 흔적을 남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어머니와의 기억을 늘 가까이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이 어머니보다 15년이나 먼저 아버지 곁으로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필자의 가슴에도 슬픔이 올라온다.  


백성과의 추억 공간-신풍루, 득중정, 낙남헌

"신풍루 사미(賜米)"는 어머니 회갑잔치 다음날 신풍루 앞에서 어려운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이다. 아래 신풍루 사미도(賜米圖)를 보면, 신풍루 2층에 정조가 앉아 어려운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모습을 직접 보고 있다.


원래 단층이었던 문을 성역 당시 2층을 증축하고, 좌우 익랑(翼廊)도 추가로 건축했다. 이런 정조의 건축 계획을 보면, 회갑 기념으로 즉흥적으로 사미(賜米) 행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정조가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난한 백성들과의 추억이 남아있는 신풍루(新豊樓)이다. 

행궁 정문 신풍루 앞에서 어려운 백성에게 쌀을 나눠주는 사미(賜米) 행사다. 정조는 2층에서 직접 참관하였다.

"득중정 어사도(御射圖)"의 제목을 보면 활 쏘는 임금의 행사로 보이나, 실제는 야간 활쏘기 행사 후 있었던 불꽃놀이가 표현되어 있다. 불꽃놀이는 땅에 묻은 화약(매화, 埋火)을 폭발시키는 훈련이라 한다.


이 행사에 어머니도 모셨고 많은 백성들도 함께 구경하였다. 아래 그림은 득중정 어사도 중 아래 부분으로 매화(埋火) 불꽃과 그 주위의 백성들의 모습이다. 


득중정 앞마당에 정조는 백성과 함께 했던 또 하나의 추억을 남긴 것이다.

득중정 어사도(御射圖)의 아래 부분이다. 많은 백성이 매화(埋火) 불꽃을 구경하고 있다.

"낙남헌 방방의(放榜儀)"는 낙남헌에서 지방의 인재를 특별히 발탁하기 위해 별시(別試)를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하고 합격증을 수여하는 행사이다. 오전 9시에 시험을 치르고 오후 2시에 합격증 수여식을 한다. 원행 8일 중 3일째 날에 있었는데 이때 문과 5명, 무과 56명이 합격하였다. 무과 경쟁률은 2.5 대 1이었다.


정조는 붉은 바탕에 쓴 합격증을 수여하고, 어사화(花)를 머리에 꽂아주고, 어사주(酒)도 한 잔씩 내려준다. 이후 합격자는 어사화를 꽂고 3일간 고향에 다녀오게 된다. 3일유가(三日遊街)이다. 진정한 지방분권은 혁신도시 건설이 아니라 지방인재 발탁이다.

지방 인재를 특별히 뽑아 합격증을 주는 방방(放榜) 행사이다. 합격증, 어사화, 어사주가 보인다.

"낙남헌 양로연(養老宴)"도 6일째 날 낙남헌에서 있었다. 주인공은 한양에서 온 노인 15명과 화성부 노인 384명이었다. 이외에 70세 이상 관리도 초청하였다. 정조는 이 노인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베푼 것이다.


최고령은, 관리로는 79세, 화성 노인으로는 99세였다. 특이한 것은 61세도 초청한 것이다. 61세는 어머니 혜경궁과 아버지 사도세자와 동갑내기이기 때문에 특별히 초대를 한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낙남헌 양로연도(養老宴圖)의 윗부분이다. 특별히 어머니와 동갑인 61세 노인도 초대하였다.

이처럼 경로잔치와 지방인재 발탁을 하며 낙남헌에 백성들과의 잊지 못할 추억을 새겼다. 백성을 대상으로 행사가 주로 열렸던 곳이 낙남헌과 득중정이다. 이곳이 백성과의 공간인 이유 세 가지 건축적 고려를 살펴본다.


첫째, 행궁의 대부분 건물이 동향인데, 이 두 건물은 모두 북향을 한 점이다. 정전과 가까우면서도, 활쏘기에 안전한 너른 공간이 필요했고, 백성이 행궁에 접근하기 편리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둘째, 낙남헌 건물은 전면과 좌우 3면이 분합문으로 모두 개방할 수 있는 구조인 점이다. 즉 광장과 100%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 처음부터 정조의 의도가 감안된 설계이다.


셋째, 낙남헌 전면에 담장을 설치하지 않은 점이다. 고정된 돌담을 하지 않고 홍살판으로 경계를 인식할 정도의 이동식, 가동식 담장을 한 것이다. 요즘 용어로는 "목재 바리케이드"라 할 수 있다. 이는 행사의 규모에 따라 개방 방식과 개방 면적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백성에게 열려있는 담장이었다.   


왕(王)의 거처라는 측면에서 보면, 파격의 파격이다. 임금에 대한 보안이나, 백성의 출입 통제 면에서 당시로는 특별한 구조임에 틀림없다.. 

낙남헌은 백성과 함께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3면이 분합(分閤)으로 개방형 구조이다. 백성과의 소통을 중시하였다.

정리하면, 정조는 어머니 회갑연을 봉수당에서 치러 어머니와의 기억공간을 만들었고, 신풍루 사미(賜米), 낙남헌 방방(放榜)을 통해 백성과의 추억공간을 남겼고, 낙남헌 양로연(養老宴)에 아버지 동갑내기 백성을 특별히 초대해 아버지와의 추억공간도 남겼다.


정조는 1752년 9월 22일 태어나 25세에 왕이 되지만 13년이 지난 38세가 되어서야 아버지 묘를 화산(花山)으로 옮겨 능(陵)으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5년 후 화성성역과 화성행궁의 건설을 시작하고 3년 만에 완성시킨다. 그의 나이 45세이다.

화성행궁 곳곳에 노후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였으나 49세 나이로 일생을 마쳐 노후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정조는 화성성역과 행궁을 완성하고 4년이 지난 1800년 6월 27일에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결국 노후를 위한 공간은 본인이 뜻한 대로 사용도 못한다. 노후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안타까우나, 생전에 많은 추억을 곳곳에 남긴 것은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며 정조의 죽음이 안타까워 내내 가슴이 저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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