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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Jun 20.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56

화성에 지(池,  연못)는 왜 만들었을까?

화성에 지(池, 연못)가 5개가 있다. 왜 이리 연못이 많을까? 미스터리를 풀어보자.


화성에 지(池)는 왜 만들었을까?


지(池)와 연(淵)은 흔히 말하는 못 또는 연못이다. 이 중 지는 남지 2개, 동지 2개, 북지 1개로 모두 5개가 있다. 하나의 성에 연못(池)이 5개나 되는 성은 화성이 유일하다. [의궤 용어 "지(池)"는 이 글에서 편의상 "연못"으로 표현한다] 


화성에 왜 이렇게 많은 못이 있을까? 이 또한 화성 미스터리의 하나다. 


연못에 대해 의궤에는 아주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남지(南池)에 대해서는 "가운데 작은 섬(中有小島)이 있으며 홍련과 백련(種以紅白蓮)을 심었다. 가운데 섬 둘(中有二島)이 있는데 두 못 사이에 정자 터(兩池之間有亭基)가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북지(北池)는 "성 밖 도랑의 물을 끌어 대었기(城外溝洫之水) 때문에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雖旱不渴)"라 하였다.


동지(東池)는 "마름과 연꽃을 심었고(種以芰荷) 가운데에 작은 섬(中有小島)이 있다. 이것이 상지(上池)이다. 하나는 구천(龜川)의 북방에 있다"라 설명하고 있다.

남은구도(南隱溝圖)에 보이는 남지(南池)의 모습이다. 상남지, 하남지 2개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에 연못은 왜 이렇게 많이 만들었을까?


연못을 만든 이유로 지금까지 공사에 필요한 흙을 조달하고, 백성에게 아름다운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면 모두 사실이 아니다. 이번 편과 다음 편이 그 근거가 된다.


흙이 필요해서 연못을 팠다는 것이 아니라는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공급에 맞는 일정이 아니다.

5개 연못(池)에서 나올 흙 량의 3분의 2는 하남지와 상동지에서 나온다. 흙이 필요했다면 많은 양의 흙이 나오는 하남지와 상동지를 먼저 파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이 2 곳은 모든 성역이 거의 끝나는 시점에 착수했다.


둘째, 흙 량이 너무 적다.

북성의 내탁에 필요한 흙은 100,000 입방미터로 계산된다. 반면에 북지에서 나온 흙은 1,800 입방미터이다. 북성에 필요한 량의 2% 정도이다. 매우 미미하다. 남지의 경우도 남성에 소요되는 량의 10%에 해당한다. 

화성의 지(池)는 휴식공간으로 연못을 조성했을까? 살펴보도록 하자. 

셋째, 초기에 흙이 필요하지 않았다.

의궤 "토품(土品)"에 남성과 북성은 "토질이 개흙과 같아서 땅을 6척을 파고 벽돌을 3중으로 깔았다"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초기에는 토질을 바꾸는 치환공사(置換工事)와 기반을 보강하는 공사라서 흙이 필요하지 않고 모래, 자갈, 벽돌, 큰 성돌(大城石)이 필요한 시기였다.


종합하면 소요되는 자재의 종류, 시기, 수량이 모두 맞지 않는다.

연못(池)을 파고 나온 흙을 북성과 남성에서 사용했다는 연관성이 없다. 오히려 개울치기 준천(濬川)으로 확보된 모래, 자갈, 돌은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종류와 시기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연못을 파야했을까? 북지, 남지, 동지 별로 살펴보자.


먼저, 북지(北池)는 왜 팠을까?

의궤에 "북지는 성 밖 도랑의 물을 끌어 대었기 때문에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북지가 성 밖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여 모아두는 역할을 했다는 근거가 된다. 

성을 쌓는데 사용한 막대한 양의 흙은 북성 밖 둔전(屯田)을 만들며 나온 흙을 사용했다. 6.25 전쟁 당시 대유평(大有坪) 사진이다. 

북지를 판 이유는 주변에 고인 물을 끌어들여 모아두기 위해 판 것이다. 예쁜 연못을 만든 것이 아니다. 요즘 말로 하면 물을 모아두는 저류지(貯留池)의 기능이다. 낮은 지형에 모여 고인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점, 용수로 재활용한 점, 무엇보다 모아두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북지 파는 것을 마친(北池畢鑿) 날이 4월 4일이고, 북성을 착수(北城始築)한 날이 4월 7일인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북성 공사를 시작하려면 웅덩이를 파서 인근 저지대에 고여 있는 물을 모아 가두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남지(南池)를 판 이유는 무엇일까?

의궤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인접한 남은구와의 관계에서 그 역할을 찾아보자. 은구(隱溝)란 성 밑에 설치한 도랑으로 이를 통해 성 안의 시냇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시냇물이 공사할 남성 터를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성을 시작하려면 시냇물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성을 쌓기 위해 웅덩이를 파고 물을 모아 가두어 두어야 했다.


상남지를 끝낸 날이 4월 1일이고 남성(南城)을 착수한 날이 4월 16일이다. 이 일정을 보면 남은구를 설치할 동안 상남지에 흐르는 물을 며칠간 가두었던 것이다. 북지처럼 저류지(貯留池) 역할을 했다. 요즘도 물이 있는 곳에서는 심정(심정, Deep Well) 공법을 사용한다.  

북지(北池)는 다른 못(池)과 달리 성 밖의 물을 끌어들여 모으기 위한 특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한 화성연구가께서 은구(隱溝) 공사는 언제 하였을까요? 질의한 바 있다. 웅덩이 파기를 마친 날부터 성을 착수한 날 사이로 보면 된다. 북은구는 4월 4일에서 4월 7일 사이에 공사를 했고, 남은구는 4월 1일부터 4월 16일 사이에 설치한 것이다. 은구를 설치한 후 그 위에 남성과 북성 쌓기를 시작한 것이다. 


결론은 성역 당시 계획자들은 치수(治水) 대책을 화성 건설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의궤 "일시(日時)"에 보면 성역 첫해 초기 공사는 측량(城址看心)과 터 잡기(立標定基) 후 개울치기(濬川), 상남지, 북지, 하동지 파기 등으로 모두 치수대책이었다.


정리하면, 북지 인근은 저지대라서 항상 물이 고여 있는 곳이고, 남지 인근은 시냇물이 통과하는 곳이었다. 웅덩이(池)를 파서 인근의 물을 모아 둔 후 은구(隱溝)를 완료하여 성 밑 지하로 물을 소통시켰다. 그리고 그 위에 성 쌓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역할로 보면 북지와 남지는 물을 모아두는 저류지(貯留池), 또는 깊은 웅덩이(深井, Deep Well)를 목적으로 판 것이 된다. 

화성 성역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공사는 북문, 남문, 북수문, 남수문, 그리고 3개의 지(池, 못)이다. 모두 공사 전 물을 제어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동지(東池)를 판 목적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살펴볼 예정이다. 화성 연못은 오늘 말한 저류지 기능만 한 것이 아니다. 세계 유일의 변화무쌍한 기능을 한 연못이다. 연못은 왜 두 개씩 붙여 만들었을까? 와 함께 다음 편에 게재할 예정이다.


연못(池)을 파서 고인 물과 흐르는 물을 잡아 둔 시간에 은구(隱溝) 공사를 한 것이다. 은구를 완료하여 성 쌓기 공사를 할 수 있었다. 지(池)를 통해 정조(正祖)의 치수(治水) 관리와 바른 공사 선후(先後) 관리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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