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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Jan 28. 2022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83

10년 공사를 어떻게 3년에 끝냈을까?-전편

화성 성역(城役)은 북수문인 화홍문에서 시작했다. 평지북성과 거기에 속한 시설물을 가장 먼저 착수하기 위해서다.


10년 공사를 어떻게 3년에 끝냈을까?-전편


화성은 여러 면에서 독보적이다. 그중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단연 "10년 걸릴 공사를 3년에 끝냈다"는 공기단축에 관한 내용이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한글본 뎡니의궤에 "1794년 봄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1796년 가을에 이르러 공역(工役)을 마치니, 시작부터 끝까지 총 34개월이나 중간에 6달을 쉬었으니 실제 공역 기간은 겨우 28개월이다. 귀신의 도움이 있는 듯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간으로는 7년, 비율로는 70%를 단축한 것이다. 


오늘은 공기단축 요인(要因)을 찾아볼 예정이다. 성역 이후 최초의 발표이고, 또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먼저 "3년"과 "10년"에 대해 정의해 보자. 이에 대한 정의가 바르지 않으면 발표 내용에 오해와 시비기 생기기 때문이다. 바른 정의만이 "공사기간", "단축기간", "단축 요인"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화성은 처음 10년을 계획하였으나 3년 안에 끝내어 7년만큼 공기가 단축되었다.

먼저, 실제 공기 3년이다. 

착공은 1794년 1월 7일에 부석시역(浮石始役), 14일 입표정기(立標定基), 25일 성지개기(城址開基) 중 하나이고, 준공은 1796년 9월 9일 여장필역(女墻畢役), 10월 15일 낙성연(落成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계획 공기 "10년"이다. 

정약용이 화성 성역 기본계획인 "성화주략(城華籌略)"을 완성한 후 정조(正祖)는 후에 감동당상(監董堂上)이 될 조심태에게 "대체로 몇 년이나 걸릴 것 같은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에 조심태(趙心泰)가 "대략 10년으로써 기한을 삼았습니다"라고 답변한다. 이 "10년"이 지금까지 알려진 계획 공기이다.


이후에도 "10년"이 또 나온다. 착공한 해(1794년) 10월 흉년으로 공사 중지를 의논하던 중 정조가 "당초 10년을 기한으로 잡았으니(而當初旣限以十年) 반드시 시일이 급하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10년"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필자가 "공기단축 7대 요인"을 선정해 보았다. 게재 순서는 단축 기간 크기와 관련이 없음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공사를 모두 마치고 하는 행사가 낙성식(落成式)이다. 사진은 낙성 기념 잔치를 베푼 낙성연도(落成宴圖)이다.

첫째, 계획된 호참(濠塹) 공사를 삭제하였다.


기본계획인 성화주략(城華籌略)의 3번에 "호참을 파도록"되어 있었다. 호참이란 성 밖에 연속된 웅덩이를 파놓아 적의 접근을 지연시키기 위한 시설이다.  


화성에 계획된 호참의 크기는 "깊이는 1장 5척, 바닥 너비는 3장, 위 너비는 7장"이다. 깊이 4.7m, 평균 너비 15.5m이다. 이 단면적(斷面積)만큼 최소 4,600보(5.4km)를 인력으로 산과 평지를 파고, 양쪽 측면을 돌로 쌓는 어마어마한 공사이다.


그러나 정조(正祖)는 "화성 주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도랑이 있음"을 보고 호참공사 삭제를 지시하였다. 이런 대규모 공사를 생략하였으니 공기단축은 당연한 것이다.

화성도 당초 기본계획에는 성 밖에 성을 따라 넓고 깊은 도랑, 즉 호참(濠塹)을 파도록 되어 있었다. 사진은 낙안읍성 호참 모습이다.

둘째, 성(城)의 높이를 낮추었다.


기본계획 성화주략의 1번 "푼수(分數)" 항목에 "성(城) 높이는 2장 5척"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조는 평지성은 2장으로, 산상성은 1장 6척으로 낮출 것을 결정한다.


낮춘 이유는 여장 높이를 5척으로 대폭 높였기 때문이었다. 화성 이전의 성에서는 그저 형식적인 낮은 여장이었다. 그리고 산상성에서 더 낮춘 것은 산을 기어오르는 적군에 비해 산 위의 아군이 방어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성 높이는 성의 공사량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평지성에서는 성이 높을수록 시간이 더 소요되는 것을 막아주고, 산상성에서는 높은 산으로 운반하는 돌(城石) 량을 대폭 줄인 것이다. 성 쌓는 공사량이 줄어 대폭 공기단축이 되었다.   

정조는 남북 간 거리가 좁다는 이유로 확장하였다. 늘어난 만큼 공기도 늘어나나 정조는 아이디어를 낸다.  

셋째, 석산(石山)을 가까이에서 찾았다.


돌을 어디서 캐느냐는 공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석산을 화성부 서쪽 5리쯤 숙지산(塾知山)과, 그 서쪽 5리쯤 여기산(如岐山)에서 찾았다. 매우 짧은 운반거리이다.


만일 용인(龍仁) 석성산이나 안양(安養) 관악산에서 채취했다면 공기단축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덤프트럭은 없었고, 인력과 우마차가 유일한 운반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운반 거리는 당시 공기에 결정적 요소였다. 가까운 석산 개발로 당연히 공기단축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많이 쓰는 돌을 캐는 곳이 멀면 공사기간에 큰 영향을 준다. 다행히 화성 석산은 모두 가까웠다. 사진은 숙지산(熟知山) 석산 모습이다.

넷째, 운반에 다양한 노력을 하였다.


화성 성역에서는 돌, 벽돌, 목재, 흙의 운반이 공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운반과 관련된 도로, 장비, 인력, 자재로 나누어 따져보자.


도로는 다행히 기존 도로를 대부분 사용할 수 있었다. "매우 평탄해서 운반하기가 쉽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오르내리막이나 구불구불했다면 새로이 길을 내야(治道) 했었다


운반장비는 다양한 기구가 적재적소에 사용되었다. 거중기(擧重機), 녹로(轆轤), 대거(大車), 평거(平車), 유형거(游衡車) 등이다. 


운반인력에게만 지급하는 노임은 특별했다. 첫째, "날 품(以日)이 아니고, 짐 수(以負)로 따져" 능률급으로 지급했다. 둘째, "거리에 따라 차등(遠近而差等)을 두어" 차등급으로 지급했다. 셋째, "힘이 약한 사람도 먹을 벌이는 되게(弱者足庇一身)" 최저임금을 보장했다. 이런 혜택으로 운반 효율이 높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인력과 소와 말과 수레로 운반을 했다. 운반이 공기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운반자재의 부피와 무게를 대폭 줄였다. 돌은 채석장 인근 치석소(治石所)에서, 목재는 구포(鷗浦) 치목소(治木所)에서, "1차로 크기 별로 다듬어 무게와 부피를 줄어" 운반량을 줄이고, 나르기 편하게 하였다.    


정리하면, 기존 도로는 곧고 평탄하여 새로이 길을 닦을 필요가 없었고, 운반기구는 다양한 기구를 적재적소에 사용했다. 운반인력에게는 특별히 성과급과 최저임금을 보장했으며, 돌과 목재는 운반 전 다듬어 중량과 크기를 최소화한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의 효과로 당시로는 공기에 큰 영향을 주는 운반에서 공기단축이 되었을 것이다. 

당초 화성의 주재료는 돌(石)이었는데 , 벽돌도 사용하여 이원화(二元化)하였다. 이유가 무엇일까?

다섯째, 벽돌(甓)을 혼용(混用)하였다.


벽돌은 당시로는 처음 사용하는 재료였다. 처음 사용하는 재료라면서 공기단축의 요인이라니 무슨 말인가?


당시 화성에 많은 구멍을 내야 하는 벽, 안팎을 매끈하게 해야 하는 벽, 그리고 곡선 구조물도 많았다. 이런 형태의 구조는 돌로 가공하고 설치하는데 시간이 천문학적으로 많이 들었다. 하지만 벽돌은 이런 구조에 가장 이상적인 재료였다. 이런 구조에 벽돌을 사용하여 공기단축이 대폭 되었다.    


벽돌 혼용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다름 아닌 "주(主)재료의 이원화(二元化) 전략"이다. 총리대신과 감동당상의 반대에도 벽돌 사용을 결단한 정조(正祖)의 숨겨진 전략이다.


대형 공사에서 주재료가 하나일 경우 공기 지연 리스크는 크다. 자재와 인력의 수요 쏠림(負荷)을 분산시켜야 한다. 돌에서 돌과 벽돌로, 석공(石工)에서 석공과 벽돌공으로 분산시켜 공기단축을 이룬 것이다.


지금까지 호참공사 삭제, 성 높이 줄이기, 석산의 인근 개발, 그리고 운반도로, 운반 도구, 운반인력의 효율 증대, 벽돌 혼용 등이 공기단축의 바탕이 되었음을 밝혔다.


다음 후편에는 나머지 단축 요인 2가지를 밝힐 예정이다. 아울러 어떻게 해야 공기단축이 되는지 실질적 노하우를 알려드리고, 지금까지 알려진 공기단축에 대한 여러 설(說)의 허구를 밝혀드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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