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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Sep 05.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67

정조(正祖)는 불교신자였을까?

정조가 아버지 능을 참배하고 용주사에 왔을 때 암살하려고 몰려든 자객들.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이다.


정조(正祖)는 불교신자였을까?


용주사(龍珠寺)에 대하여

화성군 안녕리(安寧里), 지금의 화성시 송산동(松山洞)에 용주사가 있다. 조계종 제2 교구 본사(本寺)로 경기도 사찰 업무를 총괄하는 절이다. 정조(正祖)를 매개로 화성과 인연이 있다.


이 절만의 특이한 점이 있다. 첫째, 이름 앞에 효찰대본산(孝刹大本山)이 붙는다. 둘째, 유일하게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셋째, 사찰 문으로는 유일하게 궁궐건축의 삼문(三門)이다. 끝으로 대웅보전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는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작품이다.


이런 특징은 모두 정조와 연관이 있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墓)를 화산(花山)으로 천장(遷葬)하고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고, 후에 융릉(隆陵)으로 승격시켰다.


원소도감(園所都監)이 "다른 능원의 예에 따라 원찰(願刹)을 설치해야 한다"라고 상소를 올린다. 이에 따라 융릉 인근에 용주사를 세운다. 물론 보경 스님에게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고 감동받아 건립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으로 알려졌다. 대웅보전은 보물 1942호이다.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라 이름 지었다 한다. 본전(本殿) 주심포(柱心包) 아래 용(龍) 조각 중 하나는 물고기를 먹고 있다. 스님께 물어보니 먹는 모습이 아니라 극락까지 데려다주려고 물고 있는 것이란다. 


정조의 배려로 당시 최고의 궁궐 건축 장인(匠人)과 화원(畵員) 책임자를 전폭 지원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문이 궁궐 3문 양식으로 되었고, 김홍도의 후불탱화가 탄생하였다. 홍살문도 왕의 원찰(願刹)이어서 신성한 구역임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용주사에 승병을 조직하고, 특별히 총섭(摠攝)을 두었다. 장용외영에 소속시켰고, 전시에는 독성(禿城)을 지키는데 지원하는 임무를 주었다. 독성은 세마대(洗馬臺)가 있는 수원 남쪽의 요충지이다. 

대웅보전 오른쪽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먹는 게 아니고, 극락에 데려다 주기 위해 물고 있는 것이라 한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대하여

용주사는 부모은중경 때문에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가 보경스님에게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세운 절이기 때문이다. 화성 성역이 끝나가던 해에는 "부모은중경판"을 제작해 절에 기증하였다.이래서 절 이름 앞에 "효원대본찰(孝願大本刹)"이 붙은 것이다.


부모은중경은 "효도(孝)"보다 "은혜(恩)"에, "아버지(父)"보다 "어머니(母)"에 중점을 둔 내용이다. 내용은 임신부터 자식이 나이들 때까지 베푸신 어머니의 10가지 은혜(十大恩)이다. 10가지 은혜는 검색하면 쉽게 확인된다. 내용 중 필자의 마음에 찔리는 한 구절만 적는다.


"부모가 지내시는 사정과 춥고 더운 것을 아는 체하지 않고, 문안도 드리지 않으며, 부모를 편안히 모실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가 나이가 많아져 모양이 쇠약하고 파리해지면, 남이 볼까 부끄럽다고 하여 구박하고 괄시한다" 7학년이 넘어도 후회는 더 짙어진다.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을 중심으로 정조의 능인 건릉과 용주사가 좌우에 이웃해 있다.

용주사와 정조의 여러 관계를 살펴보며 의문이 생겼다. 불교를 배척하는 시대에 그것도 임금이 큰 절을 지은 것, 홍살문과 삼문의 설치를 허락한 것, 탱화를 화원(畵員) 책임자에게 제작하도록 지원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역 기간 중에 부모은중경판을 제작하여 기증하고, 은중게(恩重偈) 125장을 만들어 성역을 담당한 감동당상 이하 패장(牌將)까지 나누어 주었다. 부처님 말씀(進言)을 성역 감독과 장인에게 나누어 준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혹시 정조(正祖)는 불교(佛敎)를 믿는 임금이었을까?


한마디로 "아니오"이다. 유교(儒敎)를 기반으로 한 왕조와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던 사대부(士大夫)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신료들의 견제 속에 어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에서 정조는 어떻게 무리 없이 용주사를 세우고 불교 경전을 성역을 담당하는 감동들에게 배포할 수 있었을까?

정조에게 3가지 비책(秘策)이 있었다.


첫째, "교라(敎理)"를 "좋은 문장(文章)"으로 전환시켰다.

정조는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블경이 이단(異端)의 학문으로 윤리에 어긋난다"라고 직접 말한 바 있다. 이런 인식에서 정조는 "부모은중경"을 불교 교리에서 분리시켰다. 즉 "불교 경전"으로 보지 않고, "좋은 문장"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도(道)를 버리고 말을 취한 것이다"라는 정조의 언급은 불교 교리를 유교의 성현 말씀으로 바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의 경문(經文)을 "논어(論語)"나 "중용(中庸)"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둘째, "신앙(信仰)"을 "교육수단"으로 전환시켰다.

불교를 말살한 것은 아니었다. 하층 백성들은 불교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정조는 "신앙"이 아니고, 백성에 대한 "교육수단"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기 어려우나, 그들이 매양 믿고 숭상하는 불법(佛法)의 말씀으로서 깊이 듣게 하고, 마음을 움직여 깨닫게 하였으니, 사람들을 가르치는 중요한 방법이다"라는 정조의 말에서 백성에 대한 유용한 교육수단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은중경을 "불교 교리"가 아닌 "좋은 문장"으로 인식을 전환시켜 배포하였다.

셋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전환시켰다.

당시는 천주교인을 감시하고 보고하던 때였다. "요사이 천주(天主)를 일컬으며 부모를 버리고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모두 오랑캐나 짐승으로 만들었다. 이에 법으로 처단하고, 요설(妖說)을 통렬히 씻어내어 한 사람의 백성도 빠지지 않게 하였다"란 언급도 하였다.


정조는 불교(佛敎)를 통해 사학(邪學)인 천주교(天主敎)를 통제하려 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단(異端)으로써 이단(異端)을 구하여"란 정조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앞의 이단은 불교이고, 뒤의 이단은 천주교이다.


그러나 정조 개인의 본심은 천주교 박해(迫害) 보다 감화(感化)에 중점을 둔 것 같다. "이단을 구하여 저절로 감화(感化)하게 하였다"라는 말로 맺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중경을 배포한 것은 "호(孝)"를 강조할 의도도 있었으나, 불교로 천주교를 통제하려는 정조의 숨은 뜻도 있었다.

"은중경(恩重經)"은 불교 경전이지만, "효(孝)"는 보편적 가치다. 비명에 간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자신이 하지 못한 "효(孝)"를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유교(儒敎)가 주를 이룬 당시에 불교와 유연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정조(正祖)의 숨겨진 세 가지 비책(秘策)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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