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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Aug 29.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66

오성지(五星池)는 왜 무용지물일까?

성에서 가장 취약한 문(門)을 지키기 위해 위에는 문루, 앞에는 옹성, 좌우에는 적대를 배치해 방어한다. 


오성지는 왜 무용지물일까?


화성에서 장안문(長安門)은 모든 시설물 중 방어에 가장 취약한 시설물이다. 따라서 좌우에 적대(敵臺)를, 위에는 문루(門樓)를, 앞에는 옹성(甕城)을 배치해 입체적으로 장안문을 방어한다.


옹성 문짝도 철판을 입혀 화공(火攻)에 대비했다. 철(鐵)의 약점은 불(火)에 약한 것이다. 철판은 방화(防火) 보다 내화(耐火) 개념으로 다뤄야 한다. 얼마만큼 시간을 지체시켜 타지 않는 상태에서 불을 끄느냐의 문제다. 당시에도 이 점을 알고 대안을 마련했다.


바로 오성지(五星池)다. 문 위에 설치한 것으로 "모양이 구유처럼 생겼고, 5개의 구멍을 뚫었다. 적이 불을 질러 문을 불사르게 될 경우 이 구멍으로 물을 흘러 넣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성역이 진행되던 시기에 정약용은 지방으로 가던 길에 화성을 지나게 된다. 이때 오성지를 보고 잘못을 지적한다. 정약용은 오성지를 화성에 설치하라고 제안한 장본인이다. 

오성지는 옹성의 바깥면과 일치시켜 설치되어 있다. 사진은 왼쪽은 남옹성, 오른쪽은 북옹성 오성지이다.

"오성지라는 것은 물을 퍼 내려서 적이 성문을 태우려 할 때 이것을 막는 것이다. 그 구멍을 곧게 뚫어서 바로 문짝 위에 닿게 하여야 쓸모가 있다. 그런데 도본(圖本)만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었으니, 이른바 그림책을 뒤져서 천리마를 찾는 격이다라고 한탄하였다"이다. 


한마디로 구멍을 옆면에 뚫었으니 물이 문짝에 직접 떨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때부터 오성지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왜 아래 면에 뚫지 않았을까? 이 또한 화성 미스터리의 하나다.


먼저, 구조를 알아보자. 의궤에 "홍예의 개판 위에는 회3물을 깔고 다시 여러 장의 벽돌을 쌓았다. 그 위에 오성지(五星池)를 설치하였다"라고 설명한다. 문 위에 나무 널빤지(蓋板, 개판)를 설치하고, 그 위에 회3물(灰三物)과 벽돌을 깐 뒤 오성지를 놓은 것이다.


정약용의 지적 대상은 사실상 성역 총책임자 감동당상(監董堂上) 조심태(趙心泰)다. 필자가 조심태에 대해 변명을 하겠다.

누조도설을 만든 정약용은 화성을 지나다 오성지를 공사한 모양을 보고 쓸모없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조심태를 위한 변명

"조심태는 옆면에 뚫을 수밖에 없었다" 세 가지 변명을 보자.


첫 번째 변명은, 조심태는 정약용의 제안대로 공사를 하였다. 

정약용 제안서의 내용은 중국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와 여곤(呂坤)의 실정록(實政錄)이다.


무비지 도면에는 오성지를 외벽 면에 일치시키고 물이 나오는 구멍은 옆면에 뚫려있다. 조심태의 오성지도 무비지 도면과 똑같은 구조로 공사를 했다.


정약용은 "성 쌓는 사람이 도본(圖本)만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어 놓았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의 말은 도면만 보고 그대로 하였으나, 목적에 맞게 조정해가며 공사를 해야 한다는 취지다.


두 번째 변명은, 아래 면에 뚫을 수 없는 여건이었다.

문짝 바로 위로 물이 쏟아지게 하려면 나무 널판인 개판(蓋板) 위에 오성지를 놓아야 한다. 이 경우 개판은 위의 회삼물, 벽돌, 오성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개판은 붕괴되는 위험에 놓인다.


개판 위에 설치한다 가정하면, 문짝과 오성지 구멍이 일치하려면 문짝을 2척 뒤로 물려야 한다. 이렇게 하면 문짝의 최대 취약부인 회전축이 적에게 노출되는 상황이 된다. 또한 물린 만큼 옹성 두께도 늘려야 할 판이다.


조심태는 여러 상황을 감안하여 모든 무게가 개판에 전달되지 않게 홍예석 위에 오성지를 설치한 것이다. 

문에서 가장 취약한 회전축은 바깥쪽 홍예석 뒤에 완전히 숨겨져 있다. 오성지를 뒤로 옮기면 회전축이 노출된다.

세 번째 변명은, 오성지 기능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여곤의 실정록에 "불을 질러 문을 불사르게 될 경우(敵以火焚門) 구멍으로 물을 흘러 넣게 된다(則可以下水)"라는 내용이 있다.


원문 "하수(下水)"의 해석이 꼭 "문짝으로 직접" 물이 떨어져야 한다는 표현일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문짝으로 떨어져도, 문짝 앞으로 떨어져도 모두 "하수(下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기능에 문제가 없다는 다른 측면의 근거도 있다. 


정약용은 "수많은 적들이 성문에 풀을 던져(千人擲草), 언덕처럼 쌓였을 때(草且成丘), 불을 붙여 문을 태우면(發火焚門)"이라 고 발화(發火)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는 불화살보다 성문 앞에 인화물을 던져놓고 불을 사르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는 의미다. 문짝 90CM 앞쪽으로 물이 흘러 떨어져도 풀에 붙은 불은 진화(鎭火)된다.


정리하면, 조심태는 중국 문헌과 정약용의 제안서를 잘 지켰고, 옹성과 문짝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안전도 감안해 설치했다. 당연히 기능에도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반대로 필자는 정약용에 대해서도 변명할 것이 있다.

중국 모원의의 무비지에서 가져와 정약용은 오성지를 제안했다. 물 나오는 구멍 위치는 화성 오성지와 같다.

정약용을 위한 변명

"아래 면을 뚫른 것도 가능하다"이다. 가능한 제안도 할 것이다. 


옹성은, 90cm 두께의 홍예석이 안과 밖으로 있고, 그 사이가 3m의 벽이 있다. 오성지는 너비가 1.5m(5척)이고, 구멍은 지름이 30cm이다. 정약용의 조건은, 첫째가 문짝에 물이 직접 떨어져야 하고, 둘째로 개판이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정약용을 위해, 오성지를 홍예석과 개판 위, 두 곳에 반반(半半)씩 걸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60cm는 홍예석 위에, 60cm는 개판 위에 놓는 것을 말한다. 오성지 너비는 1.5m에서 1.2m로 축소했다.


이렇게 설치하면, 정약용이 원했던 대로 오성지 물이 문짝으로 직접 쏟아지게 된다. 이런 결과물이 오성지에 대한 정약용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홍예석 두께가 90cm이다. 너비 1.5m 오성지를 홍예석과 개판 위에 걸쳐 얹으면 구조상 안전하가.

정약용(丁若鏞) VS 조심태(趙心泰)


이 두 사람을 비교하고자 오성지를 살펴본 것이 아니다. 국내 유일의 화성 오성지가 정약용의 지적에 무용지물이 되고, 조심태가 욕을 먹는 상황 모두가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조심태의 오성지는 원래의 제도에 맞게 정상적으로 설치되었음이 밝혀졌다. 기능에도 문제가 없게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성역 이후에 복원 시 조심태의 오성지는 사라지고, 지금 보이는 기괴한 모습으로 된 것이 더 안타깝다.

암문의 개념이 바뀌면서 사실상 암문에는 오성지의 필요성이 약해졌다.

지금까지 오성지가 이런 처지가 된 것은 사실 정약용의 "지적(指摘)" 때문이 아니라, "지적에 대한 평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약용(丁若鏞)이 생각했던 오성지의 가능성도 제안해 보고, 정약용의 지적에서 허구도 살펴보았다.


오늘은 "오성지(五星池)"를 되살려 낸 역사적인 날이고, 조심태(趙心泰)와 정조(正祖)가 누명을 벗은 기록할 만한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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