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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Oct 29.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75

[화성 문답] 게방형 옹성(開放形 甕城)

동옹성(東甕城), 서옹성(西甕城)은 왜 개방형일까?


문(門)은 성(城)에서 가장 취약한 곳으로 문루, 적대, 옹성이 함께 방어한다. 문루는 위에서, 적대는 좌우 높은 곳에서, 옹성은 전방에서 방어한다. 문루, 적대, 옹성은 문에 종속되는 시설물이다.    


옹성(甕城)은 문의 외성(外城)으로, 모양이 "반으로 쪼갠 항아리(如半剖甕)"와 같아서 옹성이라 이름 지었다. 한양에는 동대문만 옹성을 두었는데 화성에는 4곳 문 모두에 옹성을 두었다. 이것은 시대가 지나도 문이 성에서 가장 취약한 곳이라는 점과 옹성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북옹성과 남옹성은 폐쇄형이고, 동옹성과 서옹성은 개방형 옹성이다. 개방형의 특징은 옹성에 문이 없고(不設一門), 옹성 한쪽이 원성과 떨어져 있어(不接元城) 외부로 열린 형태이다. 폐쇄형은 그 반대이다.


동옹성과 서옹성은 왜 개방형 옹성일까?

화서문과 창룡문은 한양이 아닌 안산, 남양, 용인, 광주로 통하고 성 밖 백성이 빈번히 다니는 통로였다.


답(答)은 "폐쇄형 이상의 방어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살펴보자.


개방형이라도 폐쇄형에 못지않은 방어력을 계획했다. 장안문, 팔달문은 좌우가 모두 평지성이고, 화서문은 한쪽은 평지성, 다른 한쪽은 산상성이고, 창룡문은 좌우가 모두 산상성이다. 문의 좌우 지형에 따라 옹성의 형태를 선택한 것이다.


산상성에는 적대(敵臺)와 맞먹는 방어능력이 자연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반면에 평지성은 평지라서 자연 지형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양쪽에 높은 적대를 세우고 옹성을 폐쇄형으로 선택한 것이다.


한쪽이 열려 있어도 방어에 괜찮을까? 

창룡문 좌우는 자연 지형으로 인해 옹성과 옹성의 열린 부분을 방어해 줄 자성치(自成雉)가 적대 역할을 한다. 

먼저, 창룡문 좌우를 살펴보자. 화성 전체에서 보기 드문 "자성치(自成雉)"가 좌우에 형성돼 있다. "자성치"란 인공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 지형으로 인해 "스스로(自) 만들어진(成) 치(雉)"를 말한다.  


창룡문의 좌우 모두 돌출된 "자성치"가 동옹성의 개방된 입구를 감싸며 위에서 버티고 있다. 돌출된 옹성의 반(半) 이상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적이 통로 근처로 접근하기조차 두려운 "악마의 목구멍"과 마찬가지다.


다음, 화서문 좌우를 살펴보자. 화서문은 한쪽은 평지성이, 다른 한쪽은 산상성이다. 평지 쪽은 높은 공심돈을 세웠다. 치성을 돌출시키고 치성 위에 높은 서북공심돈을 세운 것이다. 평지성에 배치된 적대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산 쪽은 자연 지형이 서옹성을 감싸면서 높이도 높다.  옹성 출입구 바로 위에서 다수의 병사가 통로를 지키는 형국을 만든 것이다. 이곳 역시 적이 접근하기 두려운 "악마의 목구멍"인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문의 위치를 전략적으로 배치하였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성치의 위치에서 문을 성 안쪽으로 밀어서 배치 설계하여 자성치의 방어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이렇게 하여 옹성 좌우는 적이 접근하기에 두려운 형세가 된 것이다.

서옹성의 개방된 부분이 산 쪽으로 열려있다. 높고 튀어나온 산 쪽 지형이 있어 개방된 부분은 적이 들어오기 쉽지 않다.

동옹성과 서옹성을 개방형으로 한 요인은, 첫째, 창룡문과 화서문의 위계(位階)와도 관련이 있다. 둘째, 평지성보다 성 높이가 낮고, 좌우에 방어에 유리한 자연 지형이 있기 때문이다. 폐쇄형과 맞먹는 방어력을 자연적으로 마련했기 때문에 개방형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옹성은 좌우에 동옹성을 감싼 자성치(自成雉)가 지켜주고 있다. 서옹성은 평지 쪽에 높은 공심돈을 세우고, 산 쪽에는 옹성을 감싼 높은 지형이 방어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개방형으로 해야 했던 가장 큰 세 번째 이유는 창룡문과 화서문이 지닌 현실적 성격 때문이다. 이 두 문은 가까이 성 밖 백성과 멀리 안산, 남양, 광주, 용인 등 주변 도시 사이에 백성이 빈번히 드나들던 문(門)이었다. 


백성의 출입이 편리하도록 옹성을 아예 개방형으로 계획한 것이다. 한양과 삼남으로의 주통로인 북옹성, 남옹성과 다른 형태로 계획한 이유다. 정조의 백성 사랑이 깃든 개방형 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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