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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Dec 21. 2021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79

[화성 문답] 옹성 위에 문루(門樓)가 있어야 할까?

왜 옹성 홍예 위에 문루를 추가했을까?


옹성(甕城)은 문 앞에 반원형으로 만든 외성(外城)이다. 화성에는 문마다 옹성을 설치했다. 그런데 형식은 둘로 나뉜다. 북옹성과 남옹성은 폐쇄형이고, 동옹성과 서옹성은 개방형이다. 


문제는 북옹성과 남옹성 홍예 위 문루(門樓)이다. 의궤에 보면 그림(圖)과 설명(說) 어디에도 문루가 없는데, 현재는 문루가 복원되어 있다.  


"잘못 복원되었다, 당초부터 있었던 것이다, 원형이 아니므로 철거해야 한다"라는 여러 주장이 오가는 "옹성 위 문루"이다. 

왜 문루를 추가했을까? 이 또한 화성 미스터리의 하나다.


이유를 찾아 헤매 보자. 

당초 북옹성 홍예문 위에는 문루가 없었다. 오성지와 높은 여장만 있었다.


답(答)은 "홍예 위에 마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살펴보자.


옹성 가운데에 너비 18척, 두께 27척의 홍예 통로를 두었다. 양쪽 벽에 나무 널빤지(개판, 蓋板)를 걸치고, 그 위에 회3물(灰三物)을 편 후 벽돌을 깔고 맨 위에는 전(甎)을 깔았다.


"회삼물"이란 석회, 황토, 고은 모래 3가지를 같은 비율로 섞은 것을 말한다. 이것을 4촌(四寸) 두께로 깔았다. 13cm 두께이다. 전(甎)은 바닥에 까는 벽돌을 말한다.


홍예 개판 아래 면에는 용(龍)이나 구름(雲氣) 문양을 그렸고, 옹성 위 통로 바닥에는 전(甎)을 깔아 병사가 다니기 편하게 하였다. 그림이나 회삼물은 장기간 노출되는 목재를 비, 습기, 이끼, 부패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다.

홍예문 위에는 그림이 그려진 나무 널빤지 개판(蓋板)과 그 위에는 회3물(灰三物), 그리고 벽돌이 깔려있다.

문제는 홍예 위 부분이 구조적으로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석회는 경화되긴 하지만 나무판자 위에 그저 13cm 두께의 모래를 뿌려놓은 것과 다름없다. 한마디로 통로 위 부분은 사실상 허공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은 그 위에 병사가 여럿이 다니지도 못하고, 뛰어다니지 못하고, 무기들을 쌓아두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오성지(五星池)가 있어 물통도 비축하고 물을 쏟아붓는 작업도 해야 하는데, 할 수 없는 바닥 구조라는 말이다.


이러한 용도를 충족시킬 구조는 없을까?


홍예 위로 병사가 마음껏 다니고, 물통이나 여러 군사 장비도 적치할 수 있는 구조로 홍예 위 부분을 마루로 덮는 대책을 마련했다.


이런 구조로 하면 홍예 위의 모든 하중이 개판으로 전달되지 않고, 마루판, 장선, 기둥(은주, 隱柱)을 통해 기초로 전달되기 때문에 홍예 위 부분이 안전하게 되는 것이다. 통로의 넓이가 4.8m인데 문루 기둥 간격이 6.4m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마루만 설치하지 왜 지붕까지 만들었을까?

마루를 기둥에 연결하고 목재가 썩지 않도록 지붕을 설치해 문루가 생기게 되었다.

마루만 설치하고 외기에 장기간 노출시키면 마루나 동자주가 썩게 된다. 나무 부재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지붕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이 추가 공사 때 오성지(五星池)도 지금의 모습으로 변형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오성지 자체를 아예 없애고, 여장에 구멍만 5개 뚫어놓은 기괴한 모습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 문루 기둥 사이(6m)에 오성지(4.5m)도 설치하였다면, 지금도 옹성 문 위로 물을 쏟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이 옹성 홍예 위 문루의 탄생 비밀이다.


옹성 문루는 용도상 꼭 필요했던 것이다. 마치 2층 건물을 지어 놓고 계단을 빼먹은 것과 같은 경우다.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화성 옛 사진이다. 남공심돈 오른쪽 남암문 위에도 문루를 지었다. 원래는 없었다.

옹성 홍예 위 문루를 이해하게 되니 "남암문 문루 비밀"도 풀린다. 남암문도 성역 당시에는 문루가 없었다. 하지만 옛 사진(위)을 보면 문루가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옹성 문루와 똑같은 이유로 남암문 위에도 문루를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암문에도 문루가 있었을까?


필자는 남암문을 제외한 다른 4곳의 암문에는 문루가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첫 번째 근거는 남암문을 제외한 나머지 암문의 통로 폭이 매우 작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 큰 원여장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통로 폭은 안쪽을 기준으로 남암문이 13척 1촌인데 비해, 북암문 4척 6촌, 서암문은 5척 6촌, 동암문 7척, 서남암문 7척이다. 남암문과 차이가 크다. 


의궤에 보면 옹성에는 그림(圖)이나 설명(說) 모두에 문루가 없다. 현재의 복원 상태는 원형(原形)이 아니다. 원형(原形)이 아니라서 없애는 것이 원칙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북옹성, 남옹성과 남암문 문루는 당초부터 해야 될 것을 놓친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간, 공사비, 설계 미비 등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이 감안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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