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유 없이 건네졌고, 나는 이유 없이 그것을 받았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봄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데,
멀리서 익숙한 자전거 소리가 들려왔다.
노란 헬멧, 가볍게 들썩이는 어깨,
그리고 한 손에 들려 있는 비닐봉지.
“하윤아.”
아빠가 내 이름을 부를 때,
그 목소리는 늘 놀랍도록 조용하고 따뜻했다.
나는 무심하게 다가가면서도
벌써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빠는 말없이 봉지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슈퍼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딸기맛과 초코맛.
항상 그 두 가지를 함께 샀다.
“네가 어느 걸 고를지 몰라서.”
그게 아빠의 변명이자 습관이었다.
그날 운동장은 햇살이 아주 환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나는 딸기맛을 집어 들었다.
아빠는 남은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꺼내
말없이 내 옆에 앉아 함께 먹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도,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이스크림을 한 입씩 먹으며
아빠와 나란히 앉아 있던 봄날의 오후.
그 장면이 나는 왜 이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는 걸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 건
아빠는 종종,
그렇게 이유 없이 찾아오곤 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책가방이 무겁다고 느껴졌던 날,
때로는 급식이 맛없어서 배가 고팠던 날,
때로는 그저 수업이 지루해서 기운이 빠졌던 날.
그런 날마다
아빠는 어떤 기척도 없이
내 하루의 끝에 와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뭔가 작고 따뜻한 것을 쥐여주곤 했다.
그것이 아이스크림이든,
귤 한 알이든,
말 한 마디든 간에
그건 내 어린 마음을 다정하게 감싸주는 ‘작은 온기’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나는 한 번도
“왜요?”라고 묻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좋았고,
그냥 따뜻했고,
그냥 그랬다.
지금 돌아보면,
사랑이라는 건
꼭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었구나 싶다.
아니, 오히려
‘아무 이유 없는 다정함’이
가장 순하고,
가장 오래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내 곁에 없는 아빠.
그리고 지금, 나는 어른이 되어
누군가에게 이유를 따지며 살아간다.
‘왜 날 좋아해요?’
‘왜 나한테 그렇게 해요?’
‘왜, 도대체 왜요?’
그 질문들 속에서
나는 점점 사랑을 어려워했고,
의심했고,
때로는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금 이 노트를 펴고
아빠와의 하루하루를 다시 들여다보면
나는 자꾸 울컥하게 된다.
아빠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사랑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고,
나는 단 한 번도
그 다정함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건 아마도,
아빠의 사랑이
항상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겠지.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내 곁에 앉아 있었기 때문일 거야.
나는 지금
그때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수 있을까?
가끔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의 하루 끝에 조용히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 내밀며
아무 말 없이 웃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오늘은
그 다정함을 배운 내 마음이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본다.
아빠가 그렇게 나를 안아주었던 것처럼.
이야기는 아주 작고 평범한 하루에서 시작되었다.
그 하루들이 모여
결국 한 사람의 마음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