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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 Oct 07. 2020

말과 글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의 방패

방어기제에 관하여

바닷가재는 연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껍질 속에 산다.

하지만 이 보호막은 자라지 않기 때문에 성장 과정에서 점차 압박을 받는다. 그래서 때가 되면 안전한 바위 밑으로 들어가 새로운 갑옷으로 갈아입는다. 바닷가재는 그렇게 성장을 거듭한다.


사람에게도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갑옷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코너에 몰리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데, 이를 방어기제라고 한다. 그리고 말과 글에는 종종 무의식이 쓰는 두꺼운 방패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곤 한다.




방어기제                             

[defense mechanism, 防禦機制]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여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 의식이나 행위를 가리키는 정신분석 용어. 1894년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논문 <방어의 신경정신학>에서 처음으로 사용.

-출처 : 두산백과




DSM-IV에 분류되어 있는 방어 수준과 방어기제


DSM-IV(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서는 30여 가지의 방어기제를 7단계의 방어 수준으로 세세하게 분류하고 있다.



이렇듯 방어기제에는 종류가 다양한데, 부정, 억압, 합리화, 투사, 승화 등이 대표적인 기제로 꼽힌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영어 교육으로 유명한 Y사 영업부 팀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실적은 애초에 기대도 안 하니 제발 사고나 그만 쳤으면 싶은 팀원이 있었다.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외근만 나갔다 하면 사무실로 불만 전화가 폭주하냐고!

지금도 그 사람을 떠올리면 '아니'라는 말부터 귀에 맴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서두는 늘 '아니, 저는 그게 아니고…'.

자기 입장에선 억울하니 뭔가 변명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단 한 번도 '그럴 수 있겠다' 납득했던 적 없고, 빈말이라도 '죄송하다'라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팀장의 질타에 '아니'라고 응대하는 것이 바로 방어기제다.

아무 대답 없이 침묵하고 있어도 마찬가지. '수동-공격적 행동'이라고 한다. 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방어기제에 속한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부정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일단 거부함으로써 심리적인 상처를 줄이기 위해 쓰는 방어기제다.

보거나 들으려 하지 않고 지각(知覺)한 것을 왜곡해서 회피하기도 하고, 온전히 지각했어도 인지 과정에서 공상이 들어가 현실을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극단적인 경우에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불치병 진단을 받았을 때 그럴 리 없다며 부정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는 주로 자기 잘못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쓰인다.

'나는 잘못이 없다'라는 태도인데, 부정적 표현이 많아질수록 관계는 점점 불편해진다.

방어기제는 아니지만, 글에서 '아니'는 앞에 한 말을 스스로 부정하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아니,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뒷말을 더 강조하는 역할도 하지만 서툴게 쓰면 오히려 글이 산만해지고 신뢰도만 깎인다.



이 핑계, 저 핑계.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본인을 지키기 위한 상황 설명

합리화는 자아가 상처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상황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사실과 다르게 인식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대상의 가치를 높이거나, 혹은 낮추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자격증 시험에 불합격하고 나서,

"나 애초에 거기 별 관심 없었어. 그냥 해본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자존심을 지키는 식이다.



네 탓이야! & 맞아, 내 탓이야.

예전에 어떤 분이 자녀가 품행 문제로 학교에 불려갔던 경험을 블로그에 남긴 적이 있다. 아이의 성품은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고 하면서 어째서 그 '주변 사람'에 자기만 쏙 빼놓는지…

학교 선생님은 당연하고 이웃 사람, 교회 집사님, 옆집 사람, 하물며 시부모까지 다 걸고넘어지면서 정작 부모인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부부는 자녀 교육이 엄청 신경을 썼는데, 주변 사람이 문제라는 식이다.

그 '주변 사람'이 만약 그 글을 봤다면 어떤 기분일까?


투사는 자신의 감정이나 동기를 다른 사람에게 돌림으로써 나를 지키는 가장 흔한 방어기제다. 누구를 대놓고 탓하기도 하지만, 교묘하게 증오심을 상대에게 떠넘기기도 한다. 나는 누구를 미워하지 않는(인격적으로 훌륭한, 아주 괜찮은) 사람인데, 상대가 오히려 나를 미워한다는 식이다.


'남 탓'은 내사, 즉 본인을 탓하는 것보단 그나마 낫다. 투사는 남을 미워하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내사는 '나만 없어지면 되는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면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성숙한 수준의 자기방어

승화는 개인의 욕망이나 충동을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해소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강한 성적 충동을 에로틱한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예술은 아니지만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초창기 블로그의 성공 요인도 '관음증'을 서비스로 승화시킨 사례에 포함할 수 있다. 블로그를 비롯해 각종 소셜 매체는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궁금증을 '엿보기'를 통해 해소시켜주고 있다.


공격적 충동도 마찬가지 승화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 각종 스포츠는 던지고, 때리고, 달리는 등의 행위를 통해 공격 본능을 건강하게 풀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써야 할까?


영생(永生, eternal life)은 인류가 오랫동안 관심 가져온 키워드 중 하나다. 하지만 염색체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끝단에 위치한 텔로미어(Telomere)가 점차 소실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는 수명이 다하게 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나마 영생(永生, eternal life)이 가능한 생명체가 바로 바닷가재다. 텔로미어 손상을 막아주는 '텔러머레이즈(telomerase)'라는 효소 덕분이다.

100년을 넘게 살기도 한다지만, 바닷가재도 죽는다. 언젠가는. 성장과 탈피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지나치게 두껍고 커진 껍질을 벗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바닷가재는 평생 연약한 자아를 보호해 주던 그 든든한 갑옷 때문에 죽는다.




방어기제는 자아와 외부 조건 사이에서 겪는 갈등에 적응하도록 도와 심리 발달과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갈등의 근본적인 해소가 아니라 자신을 속이고 관점만을 바꿔 회피만 거듭하다 보면 오히려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방패를 내려놓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무의식이 쓰는 방패는 의식적으로 내려놓을 수도 없다. 다만 지나치게 방패에만 의존해 숨지 말라는 뜻이다.


방어기제를 공부하는 목적은 상대를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다. 심리 공부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나. 나 자신을 먼저 살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내가 상대에게 주로 어떻게 말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면서 방패 뒤로 숨는지를 알아야 관계도 개선할 수 있다.


남이 먼저 바뀌기만을 기대하면 어리석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나를 먼저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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