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 <가버나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 하는 질문에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작이라 불릴만한 작품인가' 라는 질문에는 대답을 망설일 것 같네요. 그럼에도 일견을 권하는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사유에 빠지게 하는 힘을 가진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지금 이 순간에도 버젓이 존재하는 빈곤의 나락과 그곳에 방치된 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말입니다. 리뷰 시작하겠습니다. 작품은 나딘 라바키 감독,
자인 알 라피아, 요르다노스 시프 로우 주연의 영화 <가버나움>입니다. 영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주관적으로 비평하는 내용이니 스포일러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작품의 배경은 기독교의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여러 기적을 행했던 지역, 가버나움입니다. 지금은 시리아 끝자락의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중동의 자그마한 나라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죠. 영화는 어린 주인공 자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누군가를 칼로 찌르고 수감되었다는, 겨우 십 대 중반도 안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는 법정에 서서 당당히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세상에 낳은 부모를 고소한다고 말이죠. 여기에서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관객들이 느꼈을 자인에 대한 첫인상은, 작고 연약하지만 씩씩하고 영리해 보인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플래시백을 통해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자인의 삶 자체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시간선으로 전개됩니다. 재판장에 있는 현재의 자인과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과거의 자인. 영화는 부감 풍경을 자주 보여줍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베이루트의 척박한 풍경은 말 그대로 '저긴 저렇더라도 결국 어찌 되든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관객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철저히 묶어두는 것이죠. 그저 관조하듯 내려다보는 절대자의 시선처럼, 카메라는 베이루트의 가장 빈곤한 지역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자인의 모습을 담아냅니다. 자인의 모습이 담길 때는 무릎을 굽히고 촬영한 듯, 어른의 허리 아래 정도의 높이로 비춰지고 간혹 자인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는 앵글도 보여줍니다. 베이루트에서 펼쳐지는 자인의 삶은 극단적인 빈곤, 그 자체입니다. 그건 몸부림이나 투쟁, 역경, 어려움 정도의 단어로 표현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자인은 그저 숨을 쉬며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노동에 투입됩니다. 가난에 한을 품는다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자인에게는 사치입니다. 자인의 형제자매들은 모여서 잠을 자는데, 위생이나 안전은 상상조차 할 형편이 못됩니다. 자인에게는 지켜주고 싶은 여자 형제 사하르가 있습니다. 자인을 삶의 희망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여동생이죠. 그러던 어느 날, 사하르의 월경이 시작되었고 이는 곧 사하르가 어딘가로 시집을 가야 한다는 의미인 것을, 자인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인의 만류와 외침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사하르를 한 남자에게 시집보냅니다.
자인의 아버지는 법정에서 말합니다. 자신은 악랄한 부모가 아니라고, 단지 닭 몇 마리가 필요했을 뿐이며, 어치피 아무 희망이 없는 이 집에서 사는 것보다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는 다른 남자의 집으로 딸을 보내준 것뿐이라고 말이죠. 그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이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노동에 투입하고, 딸들은 월경이 시작되는 시점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며 살죠. 관객들의 후기를 보면 이 부분에서 레바논의 제도와 사회적 경향, 그리고 타국의 정세 등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과연, 자인의 아버지는 죄인인가'하는 의견들과 '모두가 피해자이자 악역 없는 영화'라는 평가들이죠.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사연과 사건에 국가의 제도나 국제 정세를 이야기하며 개인의 죄를 옅게 흐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들을 이지경에 처하게 한 부분과 시리아와 레바논이라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은 부분에도 분명한 책임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로서의 잘못은 명백히 그 잘못만으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산재해 있는 사회적 문제는 저런 류의 잘못에 면죄부가 될 수 없어요. 재화를 대가로 딸의 의사와 무관한 매매혼을 강행하고 딸을 사들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도 않아 결국 딸을 죽음으로 내몬 부모가 고작 법정에서 한다는 이야기가, '우리 집은 희망이 없어 닭 몇 마리가 절실했으며 딸을 우리 집보다 좋은 곳으로 보내려 한 것이다'라는 것은 애처로운 가증,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였다면 딸을 시집보낼 그 남자에 대해 조금은 더 알아봤어야 했고, 그냥 보내줬어야 합니다. 대가를 앞세운 남자에게 딸을 강제로 보내고 이를 받아 챙겼다면, 그건 어떤 형태이든 강제 매매혼입니다. 죄악이라는 것은 자명해요. 이후, 다시 자인의 삶이 그려집니다. 세상은 자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가끔 관광객이나 타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인에게 먹을 것을 사주기는 하지만 그걸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건, 자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것들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그렇게 자인은 부모라 칭하기 애매할 만큼 나쁜 사람들이 사는 집을 나오고, 라힐을 만납니다. 라힐과 라힐의 젖먹이 딸 요나스와 함께 생활하는 자인의 모습은 처음으로 가족적인 분위기를 띕니다.
어떻게든 아이를 키우며 살아보려는 라힐과 자인. 그러나 베이루트는 여전히 지옥입니다. 자인이 뭔가를 해 나가도록 둘 리 없죠. 에티오피아 사람인 라힐은 이곳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위조된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결국 불법체류자로 체포되고 맙니다. 아직 작고 연약한 소년 자인은, 혼자서도 살아가기 버거운 삶에서, 삽시간에 요나스까지 돌봐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 처해지게 됩니다. 키워보지도 않았던 아이를 어떻게든 키워보려 가짜 처방전으로 구한 약을 물에 타서 관광객들에게 팔기도 하지만 이 빈곤의 나락에서 희망이 생길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던 중, 자인은 한 난민 소녀에게 '배를 타고 스웨덴에 가면 걱정 없이 꿈꾸던 것처럼 살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죠. 신분을 증명할 만한 서류가 있으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자인은 스웨덴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요나스와는 이별합니다. 이 부분도 씁쓸하지만 납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도 아닌 요나스를, 스스로의 생계부터가 위태로움의 연속인 자인이 책임지고 키워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는데요. 라힐의 신분을 위조해줬던 한 남자가 매번 라힐에게 요나스를 자신이 키우겠다고, 아이를 달라고 요구했었습니다. 자인은 요나스를 그 남자에게 넘기고 스웨덴으로 떠나는 데에 필요한 서류를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저 자인 스스로가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아주 간단한 증명만 하면 됩니다. 집에 돌아가 서류를 찾는 자인에게 돌아온 이야기는, 아버지의 ‘누가 ‘벌레’ 따위에게 신분 서류를 주겠느냐.’였습니다. 출생에 관한 증명도, 레바논의 국민이라는 증명도, 법적인 서류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곳저곳을 뒤지며 우연히 병원에 다녀온 서류를 발견한 자인은 평소 가족들이 병원에 갈 일이 절대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묻습니다. 누가, 왜 병원에 갔냐고 말이죠. 자인의 질문에는 아무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결국 자인은 닭 몇 마리에 팔려 시집을 간 여동생, 사하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원 문턱에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을요.
자인은 그 길로 칼을 챙겨 사하르를 죽인 남자, 아사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당연스레 느낄 법한 망설임도 없이, 자인은 단지 분노만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칼로 찌릅니다. 그렇게 자인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감옥 생활을 하는 중에 자신을 낳은 부모를 고소한 것이죠. 그리고 자인은 법정에서 또박또박, 어째서 부모를 고소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거의 유일하게 '드라마틱'이라 표현할만한 분위기를 띕니다. 관객들도 그제야 자세를 고쳐 앉고, 음료수도 다시 한 모금씩 들이키고, 눈물을 닦거나 훌쩍거리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가버나움이라는 영화가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적인 작품이며, 자인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이제야 상기시키듯 자신의 마음을 담은 대사들을 늘어놓거든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인이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찍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영정사진 찍는 거 아니니까 좀 웃어봐'라고 말하자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활짝 웃는데, 그 모습이 저릿한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에서 후일담 형식으로 영화에 출연했던 아이들에게 신분을 만들어주며 후원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소개됐고, 가버나움 재단이 설립되었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칸 영화제의 시상식 장면은, 저도 봤는데 주인공 자인 알 하지 역할의 자인 알 라피아가 소개될 때, 모든 배우와 관객들이 기립박수와 응원을 건네는 풍경이었습니다.
그렇게, 베이루트의 빈곤한 아이들에게 희망이 될만한 일은 영화의 '후일담'에서나 겨우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지옥은 단 한 발짝 나아지지 못한 채로 말이죠. 리뷰 초반에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관객의 시각과 위치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부감 풍경의 배치, 자인의 눈높이 정도의 위치에서, 몇 발짝 물러나 관찰하는 관찰자로서의 시선, 이러한 요소들은 관객이 작품에 몰입하되 일정 이상의 감정은 이입할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이죠. 그래서 관객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빈곤과 등장인물의 처량함이 단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맘 놓고 관찰하고, 온전한 공감이 담기지 않은 눈물을 마음 놓고 흘릴 수 있게 되죠. 저도 이 영화를 보며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 눈물 또한 동정과 위선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영화의 비판에 관한 여러 이야기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난민 포르노'라는 지적입니다. 난민들의 빈곤과 참상을 전시하듯 보여주며 자극적인 효과를 나열했다는 건데,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부만 동의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담백하고 직관적인 시각으로 담아냈으니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을 전시함으로써 자극적인 효과를 더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이 영화에는 신파도, 억지 눈물도 없기 때문이죠. 어린 소년 자인은 충분히 그럴 법한 상황인데도 결코 쉽게 눈물을 흘리거나 불쌍한 표정으로 관객에게 동정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어렵고 막막한데도, 미간을 찌푸리거나 한숨을 내쉴 뿐이죠. 자인에게는 눈물도, 한탄도 사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고개를 저었던 건 다른 부분입니다. 자인이 손에 칼을 쥐고, 사람을 죽이려는 의지를 품고 정말로 찔렀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감독의 무리한 선택이에요. 그 씩씩하고 어른스럽고, 자신의 생존에 있어 어떤 행동이 나을지를 처참하리만치 차분하게 분간하던 어린 소년 자인이, 여동생의 죽음에 일순간 분노해 칼을 들고 거침없이 사람을 찌른다는 것은, 자인의 캐릭터는 물론 영화 전반의 개연성까지 한 번에 무너뜨린 악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가버나움>에 대한 제 평점은 6점 만점에 3.5점입니다. 괜찮은 영화예요. 실제 현지에서 빈민으로 생활하던 아이들이라고 보기엔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한 연기였고, 진지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진 베이루트의 통렬한 빈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