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아버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내 머리맡에 툭 하고 장화모양으로 생긴 빨간 플라스틱통에 들어있는 어린이용 성탄절 선물세트를 놓고 가셨다. 이브 밤에 양말을 걸어놓고 자면 산타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와서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잠실에 단독주택이었던 우리 집은 거실에 연탄난로가 있었다. 굴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연탄난로의 연통은 너무 좁아, 나는 당연히 산타를 믿지 않았다. 아버지든 누가 선물을 놓고 가겠지.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처음으로 받은, 산타인양 아버지가 놓고 간 선물에 많이 실망했다. 그냥 기성품 아이들용 선물세트이고 별 쓰잘데기 없는 사탕만 들어있었다. 아직도 그 빨간 플라스틱 장화의 허접한 마감과, 사탕이 쏟아지지 않게 햐얗고 성긴 그물로 쌓여진 모습이 생생하다. 그물이 얼마나 질긴지 뜯기도 힘들었다. 거실에는 심형래의 '흰 눈 사이로~ 달릴까, 말까~'하는 구슬픈 캐롤이 울려 퍼졌다.
중학교에 올라간 뒤 성탄절에는 성당 친구들과 올나잇을 하는 것이 통과의례였다. 12월 24일 자정, 성탄 대축일 밤 미사를 드리고 나서 한 친구의 집을 골라 잡아, 그 친구의 집에서 케이크와 음식들을 해치우며 비디오를 빌려본 후 수다를 떨며 밤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밤을 온전히 새우거나, 지쳐서 새벽에 잠이 들곤 했다. 어느 해에는 복사단만 모여서 보내기도 하고, 어느 해에는 중고등부 아이들 중 친한 아이들끼리 다 모여 보내기도 했다.
아직 10대인 아이들이 밤을 새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 아주 가끔 마음씨 좋은 친구 부모님은 맥주등을 사주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음료수로 보낸다. 다 같이 밤을 새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 같이 아침 9시에 하는 성탄 아침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다. 우리 성당은 신자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성탄 아침이라는 이유로 중고등학생들이 안 나가면, 중고등부 미사인 아침 9시 미사가 썰렁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 같이 밤을 새우고, 아침에 미사를 드리고 그제야 각자 집에 가서 성탄절 낮은 잠으로 보냈다. 지금이야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한 회의도 많이 들어 성당에 나가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어쨌든 나의 10대 일요일과 성탄절은 항상 성당 차지였던 것은 분명하다.
어른이 되어서는 대부분 성탄 전야나 성탄절에는 일을 하느라 바빴다. 회사에서 밤을 새우며 야근을 한 적도 있었고,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항상 책상에 앉아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기억들을 생각하면, 어른이 된 후 성탄절은 그렇게 좋은 기억이 많이 없다. 오히려 괴로운 기억이 더 많지. 지금도 월요일에 보내야 해서 오늘 저녁까지 마감해야 할 일이 있다. 생각해보니 캐롤도 틀어놓지 않았다.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밤에 일하던 날이 워낙 많았어서 뭐 그닥 큰 서글픔은 없지만, 그냥 휴일에 나도 좀 뒹굴거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기왕 성탄절 단상이라고 푸념을 늘어놓는 글을 쓰고 있으니, 캐롤을 들어야겠다. 크리스마스 캐롤 하면 누구? 빙 크로스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