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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설(5)

햇반

by 박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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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햇반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방 안에서, 두 사람의 숨결이 천천히 식어갔다. 폭설에 잠긴 애월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 있었지만, 침대 위에는 한낮의 열기가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은주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먼저 잠에서 깬 K는 눈을 감은 채 파도처럼 밀려드는 관계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한낮부터 이어진 두 번의 격정 뒤, 둘은 점심도 저녁도 잊은 채, 서로를 더 이상 확인할 힘도 남지 않은 사람들처럼 기절하듯 쓰러졌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유리창을 긁고 있었고, K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깨달았다.

— 허기만이, 이제 둘을 다시 깨어나게 할 유일한 신호라는 것을.

K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오후 9시 27분.

‘우리가… 이렇게까지 잤나.’

점심도, 저녁도 건너뛰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되며,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해지는 기분과 함께 극심한 허기가 올라왔다.

K의 배가 작게 소리를 냈다.

은주는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몸을 조금 움직이자마자 그 소리에 맞춰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K는 조심스레 몸을 빼내어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에, 은주가 뒤늦게 눈을 떴다.

“몇 시야…?”

목소리에는 잠이 그대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홉 시 반쯤.”

K가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대답했다.

“아침도 대충 먹고… 점심도 안 먹었지?”

은주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자신의 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순간, 아주 적나라한 현실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하루 내내, 서로를 찾기만 했다.

몸이 이끄는 대로, 생각을 미루고, 감정을 나중으로 밀어둔 채.

은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 위가 찌그러지고 구겨진 채 두 사람의 낮과 저녁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허공을 향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배고프다…”

K는 침대에 쪼그려 앉아있는 은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주가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팔뚝살과 허기 섞인 표정, 피로가 묻어나는 몸의 선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K는 묘한 낯섦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꼈다.

은주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정말 어느 연예인 못지 않은 미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뒤편에 피곤과 나이, 허기가 동시에 비치는 순간이었다.

K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의 배가 한 번 더 요란하게 울렸다.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다가, 조금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근처 편의점 있을까?”

K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있겠지 뭐. 요즘 어디든 있잖아.”

은주는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오며, 천천히 바닥 위의 옷들을 주워 들었다.

K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 안 공기에는 아직 따스함이 남아 있었지만, 몸에 옷을 다시 걸치는 순간, 둘 사이로 아주 얇은 벽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가니, 눈은 그쳤지만 매섭고 차가운 바람은 여전했다. 주차장 바닥에는 녹다 다시 얼어붙은 눈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고, 숙소 입구에서 도로 쪽으로 난 길에는 사람 발자국이 뒤엉켜 찍혀 있었다.

해안 도로 옆으로 난 작은 편의점에서 하얀 불빛이 새어나왔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그 빛 쪽으로 걸어갔다. 은주는 목도리를 대충 둘러쓰고, K는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 은주가 다가와 K의 팔짱을 끼자,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편의점 자동문이 맑은 종소리를 내며 열렸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전혀 다른, 적당히 데워진 실내 온기와 형광등 불빛이 두 사람을 맞았다.

“라면?”

은주가 먼저 물었다.

“좋지. 햇반도 하나씩?”

둘은 컵라면 진열대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불닭, 짬뽕, 우동, 된장, 각자의 취향이 진열대 한 칸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난 이거.”

은주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제일 빨간 그림이 그려진 컵라면을 집어 들었다.

“…맵지 않을까?”

K가 물었다.

“매운 거 먹어야, 오늘 같은 날은 몸이 풀리거든.”

은주가 대답했다가,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잠시 웃음을 삼켰다.

K는 비교적 무난해 보이는 우동 라면과, 작은 햇반 두 개, 김치를 챙겼다.

계산대 위에 인스턴트 제품들이 줄줄이 올라가자, 순간, 이들이 이곳에 왜 와있는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지금을 맞이한 건지, 모두가 아는 것 같은 기분이 스쳤다. 하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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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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