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에게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쓰는 편지

by 박경민


왜 새벽이면 그럴듯한 생각들이 불쑥 찾아와 신나게 놀다가, 아침이 되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걸까?

참으로 고약한 삶이다.




HS에게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네.

너와 같은 팀에 배치받았을 때, 좋았다.

그리고 같은 파트에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도, 좋았다. 난 널 잘 알지 못했지만, 웃는 얼굴이 밝았으니, 좋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거든.

그리고 넌 실제로 좋은 사람이었지.

년쯤 함께 했을까? 5년, 6년. 그 시간 동안 너 옆에 있어서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그때는 오갱, 이지, 훈, 정수형 등등 많은 사람들과 함께해서 좋았지. 근데 요즘은 그때처럼 좋지가 않아.

아마 그래서 네 생각이 났을까?


돌아보면 네가 ‘마음 쓰는 모습’이 대단하다는 걸 알면서도, 당시에 나는 ‘굳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고 보니, 그때의 네가 그립다.

아마, 나를 보면서 ‘박갱!’하고 불러주는 그 모습이 그리고 마주 보고 웃던 그 마음이 그리운 거겠지.

넌 어떻게 그리 다정했니? 그거 많이 힘들지 않니? 넌 딱히 무언가를 바라고 다정한 사람도 아니었잖아? 언젠가 말한 너의 할머님이 너에게 쏟은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거니?

지금에 와서야 이게 궁금하다.

그때는 너의 그 다정함이 좋긴 했지만, 부럽지는 않았거든. 오히려 힘들겠다 생각했지. 난 그때나 지금이나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까칠함을 장착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면, 이젠 까칠함으로 지켜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지 않다는 것 정도일까.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 자체가 줄어버렸거든.

그래서 문득 네가 생각났을까?


년 전에 꿈에 네가 나온 적이 있었다.

년 전 일이고 꿈이었으니 기억이 정확하진 않아. 너와 나는 연말에 동기 모임인지, 어떤 모임인지, 술자리가 끝나고 함께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어. 나는 딱히 너를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 버스정류장에서 말이야. 별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 거야. 예전 신입사원 때보다 더 별 감흥이 없었던 것도 같아. 아마 서로가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난 집에 가는 버스를 그냥 보냈어. 네가 가는 걸 보고 집에 가려던 거였을까? 그렇게 버스가 지나가. 계속해서. 그리고 네가 말을 해줬는지, 아니면 내가 깨달았는지, 너도 버스를 그냥 보내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았어. 그래서 그냥 기분이 좋았던 거 같아. 꿈에서 말이야.

그때도 너의 다정함이 그리웠던 걸까?


언제인가 너와 내가 백화점을 간 일이 있었어. 이유는 전혀 기억나지 않네. 그때 백화점을 둘러보면서 네이비색 해군 스타일의 옷을 보고 ‘이지랑 잘 어울리겠다’ 내가 말했지. 그리고 ‘오갱은 하얀색 바탕에 파란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잘 어울릴 것 같다'라고 말했고 말이야. 그때, 네가 “그럼 난?”이라고 물었을 때, 난 대답을 하지 못했어. 그때는 정말 네가 어떤 스타일이 어울리는지 이미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거든. 기억하니?

근데 새벽에 깼는데 어떤 모습이 떠올랐는지 알아?

네가 아이 네 명쯤 나아서 우당탕탕, 시끌벅적한 집 안에서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는 거야. 그 표정에는 너의 다정함이 가득 담겨있지. 넌 실제로 어떤 삶을 살고 있니? 왠지 너의 아이들은 너에게도 다정할 거라는 느낌이 든다.

난 부족한 에너지에서, 나름 쥐어짜 낸 다정함으로 아이들을 대하는데, 그럼에도 전혀 응답받지 못하고 있어. 내가 부모님에게 그러했듯이, 아이들도 나에게 그러한 거겠지. 그 말은 나에게 엄하고 무뚝뚝하게 느껴졌던 나의 부모님도, 자신들의 에너지를 짜내서 나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걸 테고 말이야.

네가 주위 사람들 그리고 내게 보여준 다정함도 당시의 나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거 같아.

그래서 갑자기 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을까?


너의 삶이 궁금하다고 말했지만, 네가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는 연락이 온다면, 한 번 모이자는 연락을 받는다면 나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왜일까?

정말 모르겠네.

난, 항상 그렇듯 생각이 먼저 들고 감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깨닫는 스타일이니, 언젠가 이 감정도 알 수 있겠지.


새벽에 깼을 때는 더 멋진 생각들이 많았는데, 아침이 되니 대부분 사라져 버렸어. 회사를 관두고 일상이 자유로워지면 새벽에 떠오른 생각들을 모두 붙잡을 수 있을까?

오늘은 출근 생각에 잠을 택했거든.


다음에 또 불현듯 너 생각이 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는 그 생각들을 모두 붙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잘 지내렴.

부디 많이 웃으면서 말이야.








제 목 : 뭐라고 했어?


너의 목소리가 들렸어

길가에 쌓인 낙엽 위에서...

너의 숨결은 아직

내 귓가에 맴돌고 있었지


​너의 옛날 얼굴이 보였어

차가워진 바람 속에서...

귓가를 스친 찬바람에

너의 숨결이 흩어져 버렸지


​이런 기분이 얼마만인지

시간을 멈추고 싶은 마음에

네 이름을 불러보았어

눈을 감고서 가만히, 가만히


​지금,

까맣고 고요한 이 밤에

맑고 고왔던 너의 마음이

포근한 달빛처럼 나에게 밀려오네


​부디, 다시 나에게 말해주겠니

다시 무언가, 나에게 들려주겠니


​― inspired by Fishmans, なんてったの


https://youtu.be/792Yc11-srg?si=sae5Pds5-Hm2GJ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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