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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수나무숲 Jul 20. 2023

단순함의 위로

그냥 꾼 꿈이야.



"사실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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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뜨인 눈


남편은 웃으며 "잘 다녀올게!" 인사한다.


'남편의 티셔츠가 구겨지진 않았나...'

라는 생각이 잠시 든 순간

스르륵  다시 눈이 감겼다.


그리고 남편의 모닝인사 직전 꿈속의 마지막 내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실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람과의 관계와 일에서 기쁘고 설레는 시작은 많지만 기쁘고 설레게 끝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진행자, 쇼호스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내 직업은 특히 더 그랬다.

물에 물 탄듯한 맹숭맹숭한 이별이 대다수였고 어제까지 웃으며 내 일정을 물어오던 담당자와 연락이 갑자기 끊기거나

 혹은

제발 같이 일하자고 연락 오던 이 가 일주일사이에 마음을 바꾸어 나를 차단해 버리는 상황은 익숙한 듯 늘 서럽다.

사람, 일, 페이 이 삼박자가 딱 맞아주는 그런 행운은 거의 없다.

일이 재밌고 페이가 좋으면 사람이 늘 속 썩였고

사람 좋고 일이 즐거우면 페이는 엉망이었다.

그리고 유독 이 삼박자가 완벽하진 못해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룬다 싶으면 그 일은 서서히 물속에 잠기듯 내 손을 놓아버렸다.


집과 거리도 가깝고 담당자 친구와도 합이 잘 맞아졌고 페이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거의 2년간 함께해 온 라이브 방송이라 판매하는 상품 대다수를 대본 없이도 줄줄이 말할 수 있는 방송이었다.

그날은 봄이라기엔 조금 이른날씨였지만 나는 새로 산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다. 돌이켜보니 굉장히 잘한 선택이다.

알고 보니 그날이 나의 마지막 방송이었고 그때 입지 않았다면 새 원피스를 보여줄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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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상의 문제로 방송연결이 다소 끊겼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난 중간중간 방송시스템이 원활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늘 하던 대로 프로답게 끝냈다.

방송 후 남편과 근교 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라 여러모로 들떠있었다.

원목인테리어가 고즈넉한 매력을 뽐내는 숙소였고 곳곳에 감성이 묻어있어서 사진도 예쁘게 나왔다.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밤 9시.

갑자기 담당자가 연락이 왔다.

잠시 통화가능하냐고.

보통  이런 연락은 좋은 연락이 아니다.

급하게 통화를 했더니 사장의 지시로 진행자를 교체해야 한다며 울먹였다.

이 말을 전하기가 힘들어 사실 술도 한잔하고 연락했다는 말에 괜히 미안해졌다.


내가 애정을 쏟았던 일과는 이렇게...

 허무하게 이별했다.


이 일은 벌써 넉 달 전의 일이다.


그런데 지난 꿈을 꾼 것이다.

꿈속 시놉시스는 이랬다.

나 이후에 새로 바뀐 진행자가 마음에 안 든다며 나를 자른 회사의 투자처에서 나를 고용해야 투자하겠다 뭐 이런 드라마 같은, 그야말로 꿈속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꿈속에서 조차 나는 을의 입장이었다.

회사는 나보다 투자처 눈치를 보며 당연히 나는 함께 일해줄 거라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그때의 갑갑하고 답답한 기분을 못 이겨 나온 말이

"사실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였다.


그 뒤의 상황을 알 지못한 채 꿈에서 깨버렸지만

내심 나를 내보내고 많이 후회하고 있기를 바랐나 보다. 수없이 스쳐가는 회사와 인연들.

이게 바로 프리랜서의 삶이었다.


갑자기 허기가 졌는데 오늘따라 유독 냉장고가 비어있다.

다행히 계란 하나는 있다!

사놓고 평소 쳐다보지도 않던 오트밀을 물에 끓였다. 뭉근하게 익어가는 오트밀에 간장 한 스푼 굴소스 한 스푼을 넣고 계란을 휙휙 풀었다.

마지막에는 참기름을 한 바퀴 두르고 깨를 탈탈 털어냈다.

고소한 향이 기분을 느슨하게 만들어 줬다.

단순하지만  위로가 되는 식사였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혹시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아직 섭섭한 마음이 남은 걸까?

*내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나...

등등

복잡한 생각은  다 접어뒀다.


단순함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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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꾼 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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