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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Jan 13. 2023

‘주디스’라는 상상을 넘어 역사 속으로

영화 ‘에놀라 홈즈’ 시리즈



출처 : IMDb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만약 셰익스피어에게 주디스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오빠가 가진 만큼의 놀라운 재능을 지닌 여성이라면 대문호가 될 수 있었을까? 울프는 냉정하게 ‘아니오’라 답한다.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기는커녕 글조차 배울 수 없었던 시대에, 결혼과 가정이라는 의무 속에서, 주디스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조차 누리지 못했을 거라는 게 울프의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울프의 판단은 다소 냉철하게 느껴지지만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감각이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모든 이야기에 일괄적으로 적용될 필요는 없을 터. 낸시 스프링어는 울프의 상상력을 차용하면서도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여성 인물을 통해 여성사史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창조해냈다. 그녀는 ‘셜록 홈즈에게 그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능력을 지닌 여동생이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을 통해 에놀라 홈즈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었다. 


여권운동에 헌신한 셜록의 엄마는 막내딸이 독립적인 여성이 되길 바라며 단어 Alone(혼자)을 뒤집어 에놀라(Enola)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아빠와 오빠가 부재한, 그러니까 남성이 없는 저택에서 엄마와 함께 읽고 공부하며 자유로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에놀라는, 빅토리아 시대가 여성에게 부과한 책임 따위는 모르는 여성으로 자란다. 사회 규범에 미숙하지만 그래서 분방한 에놀라는, 어느 날 엄마가 사라지자 그녀를 찾아 나선다. 자신을 신부 학교에 집어넣으려는 첫째 오빠 마이크로프트의 손아귀를 피해서. 셜록과 같은 탐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채. 



넷플릭스 영화 시리즈 <에놀라 홈즈>는 낸시 스프링어가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현재 공개된 영화의 1, 2편은 소설 시리즈의 1, 2권을 각각 바탕으로 한다. 소설이 국내에서 출간된 지 이미 몇 년이 지났고 영화가 공개된 지도 벌써 수개월이 흘렀으므로 여기서 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영화의 2편이 공개되고 난 뒤, 극 중 셜록 홈즈의 비중이 전편보다 늘어난 것에 대해 생성된 어떤 의견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요컨대 ‘에놀라 홈즈는 왜 단독으로 존재하지 못하는가? 언제까지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에 묻어갈 텐가?’라는 것. 이 힐난에 대해 나는 똑같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에놀라 홈즈는 이미 <에놀라 홈즈>의 단독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다 하고 있지 않은가? ‘에놀라 홈즈 세계관에 어째서 셜록 홈즈와 모리아티, 그리고 왓슨 박사까지 등장하는가?’라는 질문은, 혹 ‘여성주의적 서사에 셜록 홈즈 캐릭터들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그 둘은 반드시 별개여야 한다’는 불만의 연장선 아닌가? 


<에놀라 홈즈>가 ‘에놀라’의 서사를 자급자족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애초에 이 시리즈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낸시 스프링어가 ‘단지’ 셜록 홈즈에 버금가는 여성 명탐정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면 홈즈라는 이름과 무관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먼 옛날 버지니아 울프가 상상한 대로 ‘매우 유능한 남성에게, 그와 비등한 재능을 가진 여동생이 있었다면....?’을 가정했다. 그리고 울프가 예견한 삶과는 다르게 스프링어는 에놀라에게 독립과 모험, 여성 간의 연대가 끊기지 않는 삶을 선물했다. <에놀라 홈즈>는 여성에게 마땅한 자원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양한 방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결코 열등함이 그들의 본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따라서 셜록은 에놀라의 세계에 조연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는 에놀라가 경쟁하고 교류하고 돕고 넘어서는 대상으로서, 그녀의 성장을 꾸준히 지켜보는 목격자여야 한다.



정확히 어떤 책에서 언급됐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말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이 퇴행하거나 변하지 않는 듯 보여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세상은 원래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닌, 변화에 대한 의지를 품은 소수에 의해 바뀌어왔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며 세상이 회의적으로 느껴지던 때 만난 글이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곳이, 매우 어처구니없다고 느낄 때마다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던 저 글이 <에놀라 홈즈>를 보다 떠올랐다. 영화는 명탐정 홈즈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기만 하지 않았다. 시리즈 1, 2편의 서사는 모두 여성 운동의 역사를 포함한다. 1편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이, 2편에는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극 중 에놀라가 해결해야 하는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실존했던 역사의 파편을 등장시켰다는 이유만으로 리베카 솔닛의 글이 떠올랐던 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영화의 태도가,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문장을 일깨웠다.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는 영화 <서프러제트>에 그대로 옮겨 놓아도 되는 인물이다(유도리아 역할을 맡은 헬레나 본햄 카터는 <서프러제트>에도 출연했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사회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진보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한 폭력 행위는 용인될 수 있는가? 이는 오늘날에도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난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영화는 이 난제를 고찰하지 않고, 유도리아의 행위를 적극 포용한다. 유도리아의 행적을 추적하던 에놀라는 그녀의 폭력 투쟁을 알게 되자, ‘엄마는 위험한 사람인가?’ 질문한다. 그러나 이는 고민의 물결로 번지지 않고 곧장 이야기 저편으로 사라진다. 에놀라가 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 튜크스베리 후작을 돕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작 사건에 의한 고민의 망각이 영화가 유도리아의 투쟁에 대한 판단을 얼버무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에놀라가 구하는 튜크스베리가 여성 참정권을 옹호하는 진보주의자기 때문이다. 1편의 마지막, 유도리아와 재회하는 에놀라는 왜 그런 위험한 활동을 하느냐 묻지 않는다. 그저 엄마가 주는 가르침을 되새길 뿐이다. 



2편에서 유도리아는 훨씬 더 명랑하게 등장한다. 조작된 증거로 인해 에놀라가 살인죄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자, 셜록은 사건이 자신의 능력치를 벗어났음을 직감한다. 그는 유도리아의 동료 이디스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디스와 유도리아는 감옥 성벽을 부수고 에놀라를 구출해낸다. 에놀라가 갇힌 감옥은 1편에 등장했던 신부 학교와 같다. 거짓으로 여성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압박하는 사회의 상징. 그런 공간에 유도리아는 폭탄을 던져 구멍을 뚫고 자신의 딸을 구한다. 그녀의 거침없는 행위, 그리고 그 모습을 무심하고도 명랑하게 담아내는 화면을 보며 나는 이 영화가 여성사의 한편을 꼭 끌어안고 있다고 느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싸웠던 여성들의 모습을, 어떤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정당성을 붙이지 않고 그저 인정하고 있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에놀라는 유도리아가 있어서 존재할 수 있는 캐릭터다. 여성 삶의 기반을 넓히려 한 세대 덕분에, 이후의 여성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 예컨대 삶에 대한 상상력을 가진 인생을 산다. 솔닛의 문장이 내 안에서 다시금 움텄던 이유는, 영화를 보는 동안 저 연대의 역사가 곧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에놀라 홈즈>는 투쟁의 가치를 말하지 않고 보여주고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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