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대의 얼굴을 직접 마주한 상태에서, 혹은 전화기를 들고 서로의 육성을 들으며 이야기할 때 특별히 대화를 더 잘하는 편은 아니다. 사실은 대화 자체에 젬병이다. 상대에게 결례를 범하지 않고, 나의 자의식이 과잉 혹은 빈약한 지점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무엇보다 종교/정치 얘기로 서로를 ‘미친 X’로 낙인 찍지 않도록 한갓진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정말이지 진이 빠지는 일이다. 친한 친구와도 마찬가지다. 인간으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나의 배터리는 혼자만의 시간을 상당량 보내야 그나마 빨간 불을 번쩍이지 않는다. 내가 세운 매일의 루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 울리는 전화는 사실 그리 반갑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듯,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나의 목소리는 상대를 조금도 기쁘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이가 들며 나도 조금씩 바뀌었다. 상대와 대면한 자리에서의 대화가 쉽고 원활해진 것은 아니나, 문득 날아오는 전화나 문자가 두렵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는다. 지금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상대의 애정보다 나의 욕구를 우선시했지만, ‘관계’ 속에서 밀쳐진 경험이 축적되자 누군가 내게 호감을 준다는 것이 감사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 시간이 귀한 만큼 그의 시간도 귀한 것이었다. 그런 소중한 것을 내게 나누어 준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있는가?
하지만 나의 깨달음은 너무 늦게 당도해버렸다. 이제 각자의 가정을 갖게 된 친구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로 바쁘다. 나를 포함해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은 주중엔 일하느라, 주말엔 쉬느라 바쁘다. 사람들은 이제 전화보다 톡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종일 손에 쥐고 있어도 ‘매너모드’인 무음과 진동으로 오는 메시지는 종종 우리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다른 것들에 덮이거나 잊힌다. 그렇다. 잊힌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의 소통은 대화가 아니라 공지 혹은 통지에 가까워진 것 같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나의 개인적 생각일 뿐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갖은 잡일을 하는 틈틈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침에 날아온 메시지를 한 시간 정도 늦게 봤고, 확인한 즉시 답장을 보냈는데 그에 대한 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대화는 그냥 흘러가는 말로 종결될 수 있지만, 어떤 대화는 분명한 마침표를 필요로 한다. 혹 전화가 올까 싶어 핸드폰을 계속 눈에 띄는 곳에 두었다. 한 시간 뒤, 세 시간 뒤, 그러다 두 시간 뒤 확인을 해 보았지만 화면엔 아무것도 없었다. 스마트폰을 통한 대화란 이런 것이다. 대략 일곱시간에 걸쳐 스무 개 정도의 문장을 주고받는 것. 이럴 때, ‘나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류의 생각은 고이 접어두는 게 좋다. 그런 생각은 억울함과 서운함만 키울 뿐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닐뿐더러, 나는 내가 한 짓을 알고 있다. 최근에 내가 신경안정제로 삼은 태도는 내가 세상에 너그럽지 않다면, 이 세상에 내가 발을 디딜 곳은 없다는 것이다. 나도 하루 넘어 답장을 보낸 적이 있고, 아마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부디 일부러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오늘 나는 친구의 생사 여부를 알게 됨과 동시에 그에게 축하를 전할 만한 소식을 들었고, 무려 일곱 시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도 핸드폰 메시지는 깜빡한 채 바쁘고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