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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Apr 23. 2023

어른이란 뭘까

4월 23일의 기록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님. 사교육 시장에서 적지 않은 시간 일하고 보니, 그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학생의 눈에나 선생의 눈에나 더욱 머나먼 이상향이 되었다


학원 강사로 근무하면서 내가 가장 크게 고민했던 두 가지는 ‘좋은 어른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좋은 선생님이란 무엇일까’였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학생들을 마주하며 나는 ‘어른’으로서 내가 베풀어야 하는 관용의 의무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늘 누군가의 딸이나 제자로서 무한한 돌봄과 너그러운 용서를 받았다. 또 누군가의 언니나 누나 혹은 선배로서는 그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꼰대 짓을 안 하는 데 주력했다. 고로 누군가가 내게 직접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많지 않았고, 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내가 그것을 너그러이 넘겨야 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그들이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버렸다.  

   

그렇게 칼 같은 내가 무려 ‘선생님’이라는 직함을 달고 무의식적으로(그리고 분명 의식적으로) 무례를 저지르는 학생들을 만났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떤 학생은 집에 일찍 가지 못하는 게 화가 나서 내내 부루퉁한 표정을 짓다가 내 인사에 대답도 않고 강의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누군가는 자기 친구가 내게 욕이 담긴 문자를 보내는 장난을 치도록 내버려 두었고, 누군가는 내게 성희롱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학원을 그만둬서 선생님의 월급을 깎아버리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리고 대체로 거의 모든 학생이, 나의 시간을 존중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늘 학원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그들은 꼭 본수업에 안 오고 다른 날 더 일찍 오겠다거나 늦게까지 공부하겠다는 혼자만의 약속을 한다. 내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게 조금도 불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시달릴 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내가 그나마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최대한 우아하게 사건들에 대처하고 싶었지만 잘 못했던 것 같다. 나도 사람인지라 화는 났고, 한번 분출되기 시작한 분노는 억눌러도 조금씩 삐져나왔다. 얼굴을 굳힌 채 수업을 진행한 것이 수십 번이다. 화가 날 때마다 나는 아직 인생을 20년도 살지 못한 저 친구들의 미숙함을 어른인 내가 받아줘야 한다고 주문을 외웠다. 매번 친구들의 잘못을 지적할 순 없는 거라고 말이다(물론 내게 성희롱과 욕을 하고 갑질을 한 학생들은 바로 지도를 했다). 그러나 쌓인 것이 폭발하면,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학생을 불러서 1:1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학생에게서 받은 인상과 개선했으면 좋겠는 지점들을 설명했다. 그리고 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붙였다. “너는 선생님한테 불만 없니?” 학생의 부정적 태도가 혹시 나에게 실망했거나 화가 났기 때문은 아닌지 궁금했다. “혹시 내가 무언가 잘못을 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그리고 선생님이 고쳐볼게.” 하지만 슬프게도 지금까지 내게 잘못을 지적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다. 열이면 열, 학생들은 모두 내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안도보다 아찔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과연 내가 단 한 번도 말실수를 하지 않았을까. 상대가 서운하게 느낄 법한 행동을 한 적이 없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늘 내 질문에 “아니요, 없어요”라고 답한다. 그 대답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선생님’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어른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학생들이 불만이 있어도 직접적으로 그걸 터뜨리지 못하는 윗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소위 ‘위계질서’라는 것에 내가 상층에 속해 있으며 학생들이 그런 나를 참아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겸허해진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문제를 붙잡고 늘어진 걸까. 내가 학생에게 바라는 태도의 기준선이 너무 높은 걸까. 혹시 내가 내 감정을 가장 우선시 한 걸까. 이런 질문들은 다시, 내가 어른이 맞는지 자문하게 한다. 나는 진짜 어른인 걸까? 괜찮은 어른이 되려면 어떤 요건을 갖춰야 하며, 또 무엇을 수양해야 하는 걸까.     


다음 주부터 중·고등학교 학생들 중간고사가 시작된다. 그 말은 일요일인 오늘 내가 학원에 출근해서 학생들과 공부를 했다는 의미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부 학생은 제때 시간에 맞춰 오지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시험 전날이니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퇴사를 앞두고 있다. 당분간 누군가의 공부에 내가 당사자보다 더 열성을 더한다는 자괴감, 선생과 제자라는 관계에서 비롯하는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속 시원할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찝찝하다.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발버둥만 치다가 지금의 학생들과 헤어지는 느낌이라서. 올해 EBS 수능특강 영어지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왔다. "P ersonhood is an ongoing process attained through interactions with others and one's community(인간다움은 타인 및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며 얻어지는 ‘진행 중인 과정’이다)." 이 문장을 학생들에게 설명할 때 들었던 생각은 ‘그래, 너희는 아직 어리지’라는 것과 ‘나도 아직 인간이 되어가는 중이야’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들려주기에는 조금 비겁한 생각인 것 같아서 속으로 꾹 삼켰다. 그냥 학생들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희망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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