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희구 Apr 30. 2023

닮고 싶어, 기존쎄

4월 30일의 기록

과거, 싱글맘과 그녀의 딸 이야기를 다룬 미드 <길모어 걸스>를 보며 '오, 저거 좀 엄마랑 나 같은데?'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집이 훨씬 더 마라맛 버전이라는 거



어렸을 때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게 힘들었다. 요청사항이 있어도 입을 못 열었고, 불만이 있어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상대가 실수했을 때 내가 먼저 사과했다. 두려웠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혼란스러웠고, 그런 와중에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안 좋게 평가당할까 불안했다. 나는 타인과의 갈등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이 말은 내가 묵묵하게 세상을 견뎌내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는 화를 냈고, 불만을 토로했으며, 때로 부당하게 굴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웠다. 밖에서 내지 못하는 큰소리를 안에서 맘껏 치고 나면 공허했고, 그 헛헛한 마음은 곧 자괴감으로 가득 찼다.


엄마는 나와 다른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헛소리를 좌시하지 않는다. 잘못되거나 부당한 일은 바로 짚어내고, 시정이 안 될 시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리고 정말이지 화끈하게 싸운다. 상대가 직장 상사일지라도. 어릴 때는 잘 싸우는 엄마가 조금 부끄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자주 화를 내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목소리 큰 엄마(비유적 표현일 뿐 아니라 사실적 묘사이기도 하다. 엄마는 진짜로 목소리가 크다)가 있어서 든든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직 사회에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밖에서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바로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바랐다. ‘엄마가 대신 해결해 주겠지?’하고. 그러다 머리가 좀 더 크면서는 엄마가 부러웠다. 언젠가 엄마를 앉혀놓고 이렇게 묻기도 했다. “그렇게 잘못된 걸 바로 말하면 미운털 박힐까 봐 무섭지 않아?”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들이 잘못했는데 내가 왜 쫄아.”


보고 배운 게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간의 두께가 나를 무장시킨 덕분일까. 요즈음 나는 내게서 엄마의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최근 나는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욕을 먹느니 차라리 냉정해 보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내게 다시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내 의무가 아닌 일을 부탁하는 처지임에도, 그는 내가 협조하지 않아서 상황이 엉망이라는 식의 비난을 곁들였다. 사실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 건 그 자신이었음에도. 나는 헛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못 박았다. 내가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당연히 대화는 안 좋게 끝났고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나의 대처가 현명했는지 고민했다. ‘생각해본다고 하고 거절할 걸 그랬나...?’ 하지만 나는 그를 알았다. 생각해 본다를 긍정으로 해석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화났다. 그는 내게 은근슬쩍 상황의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 그러므로 나의 냉정한 NO는 분노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 대처가 덜 우려스러워 보였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상황을 들려주며 “아, 나 왜 이렇게 화가 많아졌지..?”라고 짐짓 걱정스레 말했지만 사실 나는 나의 변한 모습이 전혀 근심스럽지 않았다. 내가 정말 엄마를 닮아가고 있는 거라면, 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함을 갖춰가고 있는 거니까. 엄마의 화는 이기심에서 비롯한 적이 거의 없다. 그녀는 늘 자식들과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몇 달 전, 엄마가 고백했다. 나를 딸이 아니라 남편처럼 의지했다고. 내가 엄마를 닮아가는 건 단지 핏줄이 같아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를, 그리고 엄마가 나를 ‘말하도록’ 이끈 것인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른이란 뭘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