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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환 Jul 16. 2020

프로야구팀은 유전(遺傳)된다

야구에 관한 추억

어렸을 때 주말이면 나는 밖에 나가서 놀기보다는 그냥 집에서 아빠와 방바닥에 누워 프로야구를 보곤 했다.

당시 아빠는 고향 연고지 팀을 응원했는데, 나는 태어난 고향이 서울임에도 자연스레 그 팀의 펜이 되었다.


우리 부자(夫子)는 "야구는 중계방송이 최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부러 경기장까지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고, 먼발치에서 아무 정보 없이 선수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클로즈업, 슬로모션 등의 영상 효과를 통해 야구를 보는 것이 더 좋았다.


어느 해 그 팀이 연고지를 바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그 팀은 아빠에겐 고향을 배신한 아주 몹쓸 팀이 되었고, 아빠가 이후 프로야구 중계를 보지 않으셨다.

이후 집 TV에는 시즌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 중계가 아닌 드라마나 뉴스가 켜져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어느 날 퇴근해보니 아빠는 야구중계를 보고 계셨다.

예전 그 고향팀이 아닌, 새로 연고지 팀이 된 구단이 있었는데, 매년 하위권만 맴돌다가 젊고 힘 있는 신인선수와 노련한 베테랑 선수들이 하나씩 은퇴를 앞두고 있는 기간에 몇 번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왔다.


아빠는 중계 내내 감독을 욕하면서도 매일 야구중계를 보셨다.

나도 옆에 앉아 모르는 선수에 대한 정보를 묻고 함께 보다 보니 어느덧 그 팀을 응원하게 되었다.

결국 내 프로야구팀은 아빠를 따라 바뀌었다.




야구 경기장은 태어나서 딱 세 번 가봤다.


처음엔 초등학교 시절 막내 이모 사촌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야구경기를 보러 간 것 같다.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구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장 통로가 혼잡해서 '사람이 사람한테 깔리거나 눌려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당시 외야 선수를 한 명 가깝게 볼 수 있었던 것 외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두 번째는 어린이날 행사 때 학교별 몇 명씩 모아서 선생님과 함께 갔던 것 같다.

커다란 기구를 띄웠는데, 당시 버너(기구에 열을 공급하는 장치)의 불이 조금 기구 풍선 아래쪽에 옮겨 붙어서 기구가 조금 불탔던 기억이 난다.

이때 야구경기가 있었는지 어린이날 행사만 마치고 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세 번째도 야구경기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 야구단 담당자들을 만나러 갔었다.

수년 전에 프로야구 경기 티켓 예매 사이트를 의뢰받아 구축한 적이 있었는데, 오픈 후 이런저런 오류와 문제가 있어서 이 부분을 협의하고(혼나고) 상의하기 위해(혼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관중석에서는 많은 관중이 모여 경기를 응원하고 있었고, 나를 포함한 일행은 관중석을 지나 야구 구단 스태프들만 다니는 경로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나오는 사무실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 어느날 야구중계를 보고 있는데 아이가 물었다.


"아빠는 왜 OO는 싫어하면서, 그 팀을 응원해?"

"이름만 같지, 같은 회사는 아니야. (기업) 그룹만 같은 거야."


한때 모 기업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이슈가 있어서 거의 매일 야근을 했고, 몇 달간 주말 출근은 물론, 오픈을 앞두고는 새벽 5시쯤에 퇴근해서 택시를 타고(잠깐 자면서) 집에 들어와 씻고는 옷만 갈아입고 다시 택시를 타고(잠깐 자면서) 사무실로 출근했다.

체력과 정신력 하나는 타고났기 때문에 버텼던 것 같다.

우리 잘못이고 고객사 잘못이고를 떠나서, 이렇게 일을 하고 나면 어느 회사든 좋은 기억으로 남기 힘들다.


아이는 그렇게 아빠를 고생시킨(?) 기업의 팀을 왜 응원하느냐는 것이다.

아이한테 한마디 더 덧붙였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났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전제품이며 먹을 거며 아무것도 못사!"




한 번은 홈페이지 제작 의뢰 게시판을 통해 '우리' 야구팀 요청이 접수되었다.

팀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싶은데, 제안과 리뉴얼에 참여할 수 있겠냐는 문의였다.


"제안 하실거죠?"

"글쎄, 여력이 안돼서 제안 안 하려는 것 같던데?"


같은 팀 펜인 후배 직원 하나가 구축 의뢰 소식을 듣고는 달려와 물었다.

기회가 된다면 제안도 돕고 자기 팀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싶은 눈치였다.


서울 연고에 성적도 좋은 팀을 응원하는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퇴근 후 잠실야구장에 관람을 가기도 하는데, 우리 팀을 응원하는 직원들은 상대적 박탈감(?) 속에 프로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조용히 침묵하게 된다.

그래도 '펜심'이 있어서 홈페이지를 만든다면 더 잘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회사는 다른 제안 일정 등으로 경쟁력 있는 제안할 수 없고, 또 수주가 되더라도 수행할 인력이 없으면 과감히 제안을 포기한다.

이번엔 그 '과감히 포기'하는 경우에 해당했다.


제안을 하지 않기로 결정되었지만, 나는 시간을 내서 홈페이지를 살펴봤다.

구축한 지 오래돼서 그런지 곳곳에 개선해야 할 것들이 많이 보였다.

'여기는 이렇게 고치고.. 여기에는 이런 기능을 넣고..'

보면서 나는 어느덧 머릿속으로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제정신을 차리고는 웹브라우저를 닫고 다른 업무를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회사 내, 혹은 모자란다면 협력사들 포함해 '그 팀의 펜'인 사람들만 모아서 프로젝트 팀을 구성한 다음 홈페이지 구축을 진행해보면 재미있었을 것 같다.

자기가 응원하는 야구팀 홈페이지를 직접 만든다면 다른 업무보다 더 신나지 않을까 싶다.

일부러 야구 경기 열리는 날 미팅을 잡고, 미팅을 끝내고는 야구 경기를 본다면, 다들 지방 출장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다.




"어느 야구팀 응원하니?"

"어... OO요."


사격 게임 점수가 어린 나이에 비해 잘 나오자, 가게 주인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묻고는,

그 팀의 로고가 새겨진 야구공을 선물했다.



우리 집안은 삼대(三代)째 같은 야구팀을 응원한다.




* P.S. : 다음번 구단 홈페이지 개편 때 의뢰해 주신다면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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