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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환 Aug 13. 2020

'왼쪽 엄지손가락'과 나의 존재가치

존재가치가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오른쪽 엄지 손가락을 칼에 베인적이 있다.

심하게 베인 것은 아니라 밴드만 붙이고 말았는데, 하필이면 손톱 왼쪽이라 키보드 'Space Bar'를 누를 때마다 상처 부위가 닿아서 한동한 고통을 참아가며 타이핑을 해야만 했다.


다 나을 때까지 불편함을 겪으면서 잠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차라리 왼쪽 엄지 손가락을 다쳤으면 좋았을 텐데..'


자판을 칠 때 9개의 손가락 대부분 골고루 사용했지만, 왼쪽 엄지 손가락은 거의 쓰지 않았다.

당시 다치는 손가락애 대한 선택권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왼손 엄지를 택했을 것 같다.




몇 년 전부터는 회사에서 쓰는 메인 장비로 Apple의 Macbook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 Windows 계열 노트북과 Macbook은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차이가 키보드다.

특수키 자판 배열이 달라서 처음 Macbook을 받아 사용할 때에는 한동안 키를 잘못 누르는 경우가 많았다.


왼쪽이 Windows 노트북 키보드, 오른쪽이 Macbook 키보드. 왼쪽은 새끼손가락, 오른쪽은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야 한다.


특히 '복붙(Copy & Paste)'이 가장 불편했다. Windows 키보드는 'Control + C', 'Control + V'를 눌러야 했는데, Macbook 키보드는 'Command + C', Command + V'를 눌러야 한다.

Window 키보드 'Control'키는 왼쪽 끝에 있었는데, MacBook 'Command'키는 'Space Bar' 바로 왼쪽에 위치 해 있다.

자연스럽게 왼쪽 엄지로 'Command' 키를 누르면서, 검지 손가락으로 'C', 'V' 키를 눌러야 했다.

왼쪽 엄지 손가락이 갑자기 바빠졌다.

키보드가 바뀌었을 뿐인데, 왼쪽 엄지 손가락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이제는 어떤 손가락이든 다치면 안 된다.




"우리 부서로 올래?"


작년 연말이 되자 신년 초 부서 개편이나 인사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무렵 몇몇 부서에서 부서이동 제안을 받았다.


이미 내가 속해 있던 파트의 대부분 사람들은 다른 부서로 옮기는 것이 어느 정도 확정된 상태였다.

부서 이동에 대해 미리 의견을 비치지 않으면, 나만 혼자 남아 파트의 명맥(?)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파트는 원래는 영업도 하고, 제안도 하면서, 프로젝트가 착수되면 프로젝트 팀을 세팅하고, 경우에 따라 PM이나 기획을 맡는 등의 업무를 진행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내가 영업담당으로서 주도적으로 사업을 찾아 착수하기보다는 다른 부서에서 영업이 된 사업에 영업관리나 PM이 부족한 경우 대타 자원으로 업무를 진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게 되면서 그때그때 맡게 되는 사업에 밀려 데이터 분석 등 장기적인 전략을 갖고 업무를 하려 했던 일들을 진행하기가 힘들어졌다. 잘할 줄 아는 일을 하다 보니, 잘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가 적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맡기는 쪽도, 맡아서 일 해야 하는 나도 서로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이 생겼다.

일이 힘든 건 상관없는데, 서로 불편한 마음을 갖고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회사에 부서 이동을 희망한다는 내용을 밝혔다.

내 이름은 연초 인사발령 공고 부서이동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부서를 옮기고 나니 내 존재가치가 달라졌다.(실제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믿고 있다.)

이전 부서에서는 대형 프로젝트를 직접 컨트롤할 수 있는 인력이 꽤 여러 명 있었지만, 지금의 부서는 나를 포함해 한두 명 밖에 없다. 평소 같으면 제안부터 사업관리까지 진행할 인력이 없어서 포기하거나, 다른 부서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던 상황에서 한두 개의 대형 사업은 추가로 자체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데이터 분석이 가능한 인력은 회사 내에 나 혼자뿐인데, 마침 옮긴 부서의 고객사 중 자사에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하고 싶어 하는 회사가 있어 바로 POC(Proof of Concept)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 부서에서는 주로 서비스를 만드는 쪽만 담당하게 되었는데, 신규 부서는 운영을 담당하는 업무들이 많아서 가능한 일이다.




해야 할 일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가끔 전보다 집중이 안 되는 부작용은 있지만 어쨌든 작년보다는 올해 하는 일들이 더 재미있다.

키보드가 바뀌면서 왼쪽 엄지손가락의 가치가 달라진 것처럼, 부서를 옮기는 시도를 통해 스스로 내 존재가치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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