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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환 Aug 15. 2020

나에게 좋은 내가 되기를

가출한 건강을 찾아 돌아오기까지...

몇 년 전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였다.


"남편분이 어르신들 포함해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혈압이 가장 높아요."


병원 간호사는 건강검진을 받고 있는 2-30여 명의 사람들 중에 내가 혈압이 가장 높다는 이야기를 무슨 비밀이라도 된 듯 아내에게 소곤소곤 일러 주었고, 그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다.


부모님 모두 본태성 고혈압이셨고, 나 또한 혈압을 측정하기 시작한, 아마도 직장인 건강검진을 처음 받은 때부터 평균보다 혈압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여 년 전부터는 혈압약 복용을 권유받았었는데, 왠지 그때부터 혈압약을 먹는다는 것은 뭔가를 크게 잃었다는, 근시로 안경을 평생 쓰는 것처럼 왠지 모를 패배감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크게 문제가 없는 한 버티고 또 버텨보리라 마음먹고, '운동도 하고, 스트레스도 줄여보지 뭐. 술도 줄이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그쳤다. 실행을 좀 했으면 좋으련만.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작년 여름부터였다.

꼭 혈압 때문만은 아니고, 그동안의 생활습관과 업무 스트레스 등 여러 가지 복합요인이 작용했던 것 같다.


우선 밥을 먹는 시간이 길어졌다. 식욕이 없는 것은 아닌데 입으로 잘 넘어가지가 않는다고나 할까?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마쳤을 때 내게는 딱 1/3 만큼의 밥이 남았다.

밥을 먹는 일이 힘이 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O팀장. 나 오늘도 지하철역에 누워있다."

"나오지 말고, 다시 집에 들어가서 쉬어."

"아니야, 오늘 할 일 많아. 좀 있다가 덜 어지러워지면 출근할게."


인사 부서에서 휴가나 출퇴근을 관리하는 동갑내기 직장 동료에게 지하철 의자에 누워 메시지를 보냈다.

타고 가는 지하철에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아 중간에 내려 쉬었다 출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저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런 거예요."

"그래요? 구급차 불러드릴까요?"

"아니에요. 좀 지나면 괜찮아져요."


지하철 보안요원이 새벽까지 술 마신 취객이 누워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말을 걸어올 때도 있었다.

아내에게 병원 예약을 부탁했다.


의사는 24시간 주기적으로 혈압과 심박수를 측정하는 기기로 혈압을 재 보고 다시 진료를 하자고 했다.

측정 결과 이완기 혈압도 100이 훨씬 넘었고, 결국 혈압약을 처방받았다.


약을 먹고나서부터 혈압이 떨어지긴 했지만, 너무 약이 강한 건지 하루에도 몇 번씩 어지러워서 사무실 책상에 괜찮아질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이후에는 2주, 한 달, 두세 달치씩 약을 바꾸거나 줄여가며 내 몸에 맞는 혈압약과 용량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혈압도 잡히고 컨디션도 돌아왔다.




어느 날 TV에서 우연히 '케톤 식이요법', 일명 '저탄 고지 식단'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과체중이라 체중관리가 필요하거나 당뇨병 등 성인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탄수화물을 줄이고 지방을 늘리는 식사를 통해 조금씩 건강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왔다.

식단 조절을 통해 혈압이 낮춰지는 효과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다.


혈압을 낮추는데 좋은 식품을 평소에 자주 먹으라는 등의 혈압 관련 식이요법 자료들은 많이 봤지만, 몸의 연료 자체를 탄수화물에서 지방으로 바꾸는 방식으로도 혈압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물론 그 식단이 맞다 틀리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여러 전문가, 체험해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것 같다.

사람마다 몸도 차이가 있어서 무엇이든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괜찮을지 망설이기보다는 내 몸을 실험 삼아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마트에 가는 것을 전쟁터 나가는 것보다 싫어하는 내가 아내에게 먼저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고기류, 오일류, 야채류 등 케톤 식이요법으로 추천되는 식품들을 골고루 담았다.

보통 서서히 탄수화물 양을 줄이고, 지방과 단백질 섭취를 늘리기도 한다는데 나는 단번에 모든 쌀과 밀가루류 음식을 끊었다. 당분이 들어가 있는 음료도 일체 마시지 않았고, 가끔 집에서 마시는 커피믹스도 블랙으로 바꿨다.

술도 맥주나 막걸리는 절대 먹지 않고 소주와 같은 당질 함량이 낮은 술만 마셨다.


아내가 만들어준 셀러드


혈압약을 먹고 나서부터 가정용 혈압계로 1~2일에 한번씩 혈압을 측정하여 기록하고 있었는데, 식단을 바꾼 후 혈압약을 끊고 계속 혈압을 측정해 나갔다.

식단 조절을 해도 혈압약을 먹지 않아 혈압이 높아진다면 다시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음번 병원에 갔을 때 혈압약 복용할 때와 식단을 바꾸면서 약을 끊었을 때의 혈압 그래프를 가지고 갔다.

의사는 그래프를 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아주 적은 양이라 계속 드셔도 상관없는데, 본인 의지가 그렇게 크시다면 혈압약은 처방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가정용 혈압계로 수축기 혈압이 135가 지속적으로 넘으면 다시 방문해주세요."


혈압약 복용할 때와 안할 때 혈압은 비슷했다


"혈압약 안 먹어도 될 것 같데."


병원 문을 나서며 제일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하루에 매일 하고 있는 일 중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일은 '먹는 일, 먹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퇴근 후 마시는 술 한잔에 우울했던 기분이 풀리기도 하고, 손톱보다 작은 약 한 알이 혈압을 뚝 떨어트리기도 한다.

매운 음식 한 모금이 시원한 에어컨 앞에서도 땀을 흘리게 하고, 커피 한 잔에 정신이 바짝 차려지는 경험도 한다.

어떤 사람은 복숭아 냄새만 맡아도 온 몸에 알레르기가 올라오기도 하고, 청산가리 0.2g은 사람에게서 목숨을 빼앗는다.


기분을 위한(먹고 싶은) 음식은 찾아 먹고 있었지만, 이 좋아할 만한, 에 먹여야 할 음식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번에 식단을 바꾸고 컨디션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내 몸을 가장 아끼고 챙겨줘야 할 사람은 '나'이고, 먹는 것뿐만 아니라 보고 읽는 것, 나를 위한 여러 행동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매일 '나에게 좀 더 잘해주자.'라는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있다.




Epilogue


180cm가 넘는 키에 체중이 70kg이라 저체중에 속하는 편이였는데, 저탄고지 식단으로 바꾸면서 본의아니게 한때는 체중이 65kg정도까지 빠졌었다.

식단을 바꿔서 그런 것이고, 몸도 좋아졌다고 말씀드렸지만, 양가 어머님들은 아내에게 많은 눈총을 주셨다.

특히 장모님은 나를 보실 때 마다, "저렇게 비쩍 마른 몸으로 어떻게 친가 어머님을 뵙겠나."며 딸에게 남편 제대로 좀 먹이라며 잔소리를 하셨다.

그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셀러드를 챙겨준 아내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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