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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처 Nov 08. 2024

망가진 학교, 포기하는 선생님

학교를 방임하는 사회

  초등에서 담임을 맡아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나처럼 전담교사로 특정 과목만 맡아 가르치게 되는 해도 있다. 1년을 책임질 반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부담이 덜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6학년 담임으로서 아이들을 무사히 졸업시키고 나서 드는 안도와 보람, 성취감 같은 건 느끼기 어렵다. 누군가의 성장 과정에 깊게 개입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책임감도 필수지만 스스로 자부심이 있어야 무너지지 않고 한해를 잘 보낼 수 있다.


  아이들이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서로 즐거워하는 걸 지켜보는 건 교사의 기쁨이자 행복이다. 감정적으로 더 솔직하고 표현도 자유로운 아이들 틈에서 거꾸로 사랑을 배워간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때때로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하는 걸 보는 건 괴롭지만 또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 교사의 역할이란 그러니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것인가.


  인천에서 한 초등 특수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길 들었다. 인력부족과 과밀학급 상황 속에서 병가조차 마음대로 못 쓰다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이런 안타까운 일에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이 있었단 얘기는 빠지질 않는다.


  요즘엔 학교마다 담임을 맡는 일도 얼마간 각오를 하고 시작하는 분위기다. 이미 중등에서도 담임을 기피하는 건 당연한 분위기다. 담임이든 전담이든 학부모의 소송에 휩싸이고 아동학대로 신고받는 경우가 정말 흔하다. 전에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체육 선생님 한 분은 호루라기를 학생 가까이에서 불었다고 아동학대로 신고받았다. 그러고 몇 개월간 수업에서 배제된 채 고소 학생과 마주치면 안 된다며 동선을 새로 짜고 급식시간까지 조절해야 했다. 결국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났지만 선생님의 그간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 고소한 학부모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지속되는 민원에 교사가 병가를 내고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아예 퇴직을 결심하는 경우도 많다. 몇 해 전 퇴직했다가 작년에 함께 근무했던 기간제 선생님은 과거 그만둘 당시의 아이들을 떠올리면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난다고 하셨다. 감당할 만한 일은 기억이 되고 보람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트라우마로 남고 사람을 병들게 한다.


  선생님들은 학교를 떠나고 있다. 이 직업에 환멸을 느끼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나고, 무력감과 두려움 끝에 그만둔다. 그에 앞서 심적으로 더 이상 예전만큼의 애정과 에너지를 쏟고 싶어 하지 않는다. 꽃으로라도 때리지 말라고 했는데, 한번 꽃으로 맞아본 사람은 꽃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사납고 깊은 상처를 남기는 데엔 무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휘두르는 자의 집요함이 관건이다. 자기 아이를 내세워 학부모가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하면 교사로선 마땅한 방법이 없다. 


  학교는 교육이라는 본질을 도외시하는 공간이 됐다. 우리 사회도 교사에게 더 이상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부모들은 오로지 자기 자식의 진학을 위한 수단으로써 학교와 교사를 입맛대로 구워삶으려 한다. 심하게는 학생과도 무관하게 학부모 자신의 분풀이 대상으로 학교를 택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숱하다. 교사라는 업에 대한 노고를 인정해 주는 바라지도 않는다. 교장부터 찾거나 전화로 소리치는 학부모들의 고압적인 태도를 보면 정이 다 떨어져 나간다. 그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정도면 다행인데 어떻게든 교사와 학교를 걸고넘어져 소송과 이권 투쟁의 장으로 변질시키려는 자들을 보면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은 각자도생의 시대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정이 많은 사회다, 한국인의 정, 그런 얘기를 했다. 요즘 그런 얘기를 하는 건 향수에 젖은 시대착오에 가깝다. 집단주의 사회라는 건 지금도 통용되지만 그건 우리 문화의 일부분을 이해하는 데만 도움이 될 뿐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남을 이기거나 적어도 뒤처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쳐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바보가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소한 일에도 날을 세우고 조금이라도 손해 본다는 기분이 들면 곧바로 되갚아주는 게 사이다스러운 결말이라며 좋아하는 시대다.


  비슷한 현상은 학부모들 간에도 벌어진다. 아이들끼리의 마찰을 학교폭력으로 신고부터 하고 신고받은 학부모는 맞 학폭 신고를 한다. 학폭위의 판단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로 인한 법정다툼도 불사한다. '학교폭력', 말이야 그럴싸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의 학교폭력 신고가 빗발친다는 것은 이 제도의 취지로부터 한참을 벗어났다는 걸 알려준다. 이 지난한 과정에서 교사의 한마디 증언이나 학교의 조치로부터 흠잡을 만한 곳을 찾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점을 취득하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그동안 아이들은 사과할 기회마저 뺏긴 채 데면데면하게 지내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 일 없었던 듯 잘 지내는 경우도 많다.


  학교가 더 이상 교육 문제로 고민할 여력이 없다. 넷상의 여론에는 기껏 교사 입장에서 요즘 학교가 정말 힘들단 얘기를 하면, '누가 칼 들고 협박하냐, 월급 주는 만큼만 하든지, 힘들면 관둬라.' 이런 반응이 흔하다. 오로지 교육을 통해 자식 세대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었던 윗 세대들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학교가 망가져도 상관이 없거나 그게 흔한 일이 돼도 자신의 일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 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고스란히 엿보인다. 학교만 병들어 있는 게 아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니까 너무 행복하고 좋죠? 직업을 밝히면 옛날엔 이런 얘기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는데 이제는 아예 없다. 바깥에서도 어느 정도는 실상을 알게 됐기 때문이겠지. 꽃을 꺾어 휘두르려는 인간들이 불시로 난입하는 공간에서 교사는 무얼 해야 할까. 꽃으로부터 본인이 다치지 않도록 자기 자신부터 지켜야 한다. 지금 벌어지는 문제들은 본인으로부터 기인한 게 아니라 병든 사회와 시스템의 허점이 학교로 틈입해 오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꽃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잘 알겠지만 각자도생의 시대에 맞게, 이런 기이한 조언도 통용되려나. 선생님 왜 열심히 사랑하세요, 월급 받는 만큼만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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