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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푸른 Feb 14. 2020

Episode 08. 왠지 모를 씁쓸함

나를 찾아 떠나는, _Ronda&Malaga(2020.01.14.Tue)

세비야를 떠나 가는 도중에 들린 론다. 한적한 거리를 보면서 가쁘게 몰아쉬었던 숨을 길게 내쉬어 본다.






여행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니들은 어딘지 모르게 편안하지 않아 보였다. 같은 곳을 보는데도 우리는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걸으며 즐겁게 말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화가 끊긴 후에는 어색한 침묵이 슬며시 찾아들곤 했다. 언니들이 불편한 이유는 여행 때문이 아니었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리스본에서 머무를 때 우리는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 와 숙소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며 말을 트기 시작했다. 여행에서 겪은 재미난 일화와 여태까지 방문했던 곳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와 맛있었던 먹거리 등에 대해서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화젯거리는 일상에서 멀어져 있었지만 어느새 일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20살이 되면서 대학생 새내기가 된 나를 포함한 우리 전부는 대학생이었다. 새로운 시작이 두려우면서도 앞으로 하게 될 공부에 설레어하고 있는 나를 언니들은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언니들은 저마다 걱정을 한아름씩 안고 있었다. 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선생님들은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수업하러 들어올 때마다 한 말이 있었다.



"대학 가면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간혹 가다가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희망적인 말만 했다. 선생님들이 했던 말과 언니들이 하는 말은 달랐다. 언니들의 대학생활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대학생'이었던' 선생님들에게 듣는 말보다 현재 대학생'인' 언니들에게 듣는 말에 나는 주의를 기울였다. 나보다 학년이 위인 언니들은 놀 수 있는 시기는 1학년이 유일하다고 하면서 공부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때 많이 못 놀았던 것이 아쉽다고 말하는 언니도 있었다. 2학년이 넘어가면 학점 관리하랴, 스펙 쌓느라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새내기 대학생인 나를 위한 조언으로 입을 열었지만 언니들은 하나둘씩 걱정거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언니들은 신기하게도 이과에 가까운 전공이었고 나만 전형적인 문과생이었다. 룸메이트 언니는 생명공학과, 26살 언니는 의대를 다니고 있으며 23살 언니는 동물자원학부에 속해 있었다. 속으로 언니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찰나에 갑자기 동물자원학부에서 공부하고 있는 언니가 영어학과가 더 좋다고 말했다. 의아해했다. 언니들에 비하면 나는 대학에 거저 들어온 셈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문과보다 이과가 성적 내기도 어려울뿐더러 대학에 갈 때에도 훨씬 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언니가 뒤이어 한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영문학과가 취업하기에 유리하니까."



언니들이 하는 고민은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취업'에 대한 고민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에 있었지만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취업이었다.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힌 대학생들에게 좋은 과란 취업이 잘 되는 과, 혹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과였다. 현실은 씁쓸했다. 대학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배움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곳이 아니었다. 취업하기 위해 거쳐가야 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언니들은 학과 공부가 재미있다고 하긴 했지만 학점 때문에 수강 신청할 때 신중을 기한다고 말했다. 자칫하다가 어려운 수업을 들으면 학점이 낮게 나오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취업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학과에서 듣는 수업은 공부 같지 않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생명공학과의 경우에는 고등학교 때 배운 생명 과목을 심화한 수업을 듣는데, 생명 I과 생명 II를 대학에 와서 복습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언니들이 서로 대학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생각에 잠겼다. 대학교는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문을 두드린 학생들에게 차갑기 그지없었다.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다. 한창 열정적으로 삶을 가꿔나가야 할 시기를 두려움으로 가득한 시기로 만들어버렸다. 말하는 동안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를 연발했던 룸메이트 언니 같은 대학생들이 모여 있는 대학. 어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생기 넘치는 곳이 아니라 학점을 위해, 스펙을 위해 바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생활하는 대학생들이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대학 생활의 낭만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여행에 와서도 행복해하기보다 걱정을 하고 있는 언니들을 보며 씁쓸함을 느꼈다. 왜 언니들을 포함한 대학생들이 불안해야 하는지, 남을 밀어내기 위한 경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한 듯이 요구하는 것들을 나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당함을 느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고 받아들이는 대학생들. 지방에 있는 대학을 다니기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학생들. 나는 그 속에서 어떻게 해야 맞는 걸까. 언니를 비롯한 대학생들처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며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부당해도 침묵하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걸까.



가끔 언니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던 불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학생들이 불안해하지 않고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졌다.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편치 않게 여기는 환경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우리는 언제부터 당연하지 않은 요구를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었을까. 



말라가에 있는 숙소에서 음식을 나눠 먹으며 같은 고민을 털어놓고도 편하지 않을 언니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지는 밤이었다.



여행자로서 갖는 여유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갖는 여유의 온도차는 얼마나 다를까. 말라가에서 본 풍경은 론다에서 본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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