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리스본에서 버스를 타고 세비야로 이동하던 중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들렸다가 버스로 돌아가고 있을 때 보이스톡이 걸려왔다. 룸메이트 언니와 마트에서 나오면서 전화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여 혼자 있게 된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말로는 낯선 사람들과 지내니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고 했으면서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 눈물이 나왔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돌아가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어린아이처럼 아빠에게 집으로 가고 싶다고 투정 부렸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 내가 직접 돈을 벌어서 온 여행이니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 생각을 바꾸었다. 언니가 불편한 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돌아갈 방법도 마땅치 않지만 내가 쓴 돈이 아까웠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얼른 눈가를 닦고 버스에 올라탔다. 힘들다고 울음을 터뜨린 내가 부끄러웠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할 수 있다고 말하며 큰 소리를 치고 왔는데 나약한 나의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 혼자 헤쳐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려고 한 내가 못마땅했다.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혀 나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감정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했다. 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며 벗어나고 싶어 해 봤자 좋아질 일이 아니었다. 내가 처한 상황 자체를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나를 찾아 떠난 여행'. 바쁘게 여행지를 돌아다니느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너져 내리기 전까지는. 집에서 편하게 생활하며 매일 똑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몰랐을 것이다.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여행이었다. 무너졌던 못난 모습을 보지 않으려 어디론가 숨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무너진 덕분에 내가 어떤 상황에서 힘들어하는지, 강한 줄 알았던 내가 나약해지는 순간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여행하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을 쌓아가는 내가 도리어 자랑스러워졌다.
여행을 떠난 지 나흘 째가 된 12일, 그동안의 기억을 되짚어봤다. 룸메이트 언니를 비롯한 다른 언니들과 나쁜 기억만 쌓인 것은 아니었다. 힘든 순간도 있었고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친 순간도 있었지만 기쁜 추억이 훨씬 많았다.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을 기억이 많았다. 언니들과 숙소에서 같이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나에게는 소중한 기억이었다. 집에서 지낼 때의 평범함은 지루함으로만 다가왔다. 똑같은 하루가 지겹게만 느껴졌다. 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을 때 집에서의 평범함을 느꼈다. 그 평범함이 소중함을 알 수 있었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주는 특별함 때문도 있었지만 각자가 다르게 느낀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며 느끼는 평범함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소중했다.
오후 시간이 돼서 세비야에 도착했다. 장시간 이동으로 지친 우리는 숙소에서 각자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 만났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스페인 광장까지 느긋하게 걸어갔다. 분수대 쪽으로 가는데 고약한 냄새가 나를 사로잡았다. 냄새의 원인을 찾아 킁킁거리며 둘러봤다. 마차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말의 똥에서 나는 냄새였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냄새가 싫지만은 않았다. 말 똥 냄새로 스페인 광장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기에 그리 고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비야 대성당으로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웅성 웅성대며 모여 있었다. 시내를 지나고 있는 참이었다. 힘찬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한 남자는 앉아서 기타를 연주하고, 여성은 플라멩고 옷을 입고 흥겹게 춤추고 있었다. 우리도 사람들 틈에 끼어 구경했다. 구경한 지 시간이 얼마 안 되었는데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공연의 막바지에 왔던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뗐다. 입장 시간이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사진만 찍었다. 여기서도 구수한 말 똥 냄새가 풍겨왔다. 오히려 냄새가 반갑기까지 했다. 스페인 광장에서 있던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곳곳을 돌아다니고 허기진 우리는 한참을 돌아다니다 빠에야 맛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연 식당을 찾기가 힘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독특한 문화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에는 '다섯 끼 문화'가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 것이다. 9시경에 밥을 먹는데 커피와 빵으로 간단하게 채운다. 약 11시부터 12시 정도까지는 간식을 먹는다. 오후 1~2시 사이에는 점심을 먹는다. 3~4시까지 추로스나 달콤한 빵으로 또 한 번 간식을 먹는다. 5~6시 정도에도 역시 간식을 먹는다. 중간에 간식을 많이 먹어서 저녁 시간이 늦추어질 수밖에 없다.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 식사 시간이 굉장히 늦다. 한국에서는 보통 7시 이전에 먹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주로 8~9시 정도에 저녁을 먹는다. 아주 늦을 경우에는 10시에도 먹는다고 한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손님이 들어와도 식당을 열 준비를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너무나 배가 고파 하마터면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를 뻔했다. 우리는 웨이터가 올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 우리는 배가 많이 고파 양이 많아 보이는 빠에야를 시켰다. 해물 빠에야와 먹물 빠에야 각각 두 개를 주문했다. 스페인에서는 샹그리아가 유명하다는 소리를 들은 우리는 조금씩 나눠 먹기로 하고 병으로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허기진 우리의 배를 채워줄 기특한 음식. 보기만 해도 침이 입안에 고인다. 처음 맛본 샹그리아. 달콤하고도 상큼한 맛에 자꾸 잔을 기울이게 된다.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는 스페인 광장까지 씩씩하게 걸어갔다. 바람이 세게 부는데도 끄떡없었다. 오후 시간에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해가 져서 그런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이 지니는 매력에 빠져 들었다. 우리는 각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찍고 싶은 곳을 핸드폰에 담았다.
은은한 조명 속에서 빛나고 있는 광장의 모습이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